박인환 시인 / 검은 강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最終)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硝煙)이 가득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고향에 가서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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