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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천상병 시인 / 어머니 변주곡(變奏曲)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6.

천상병 시인 / 어머니 변주곡(變奏曲)

 

 

어릴적이었지만은 자가제(自家製) 연날기를 했단다.

유리가루를 연실줄에 묻혀서 날린다.

그러면 5,6세 연령인데도 오십미터 가까이 날아간다.

 

연날리기대회는 내 고향, 진도에서는 설날인가 했단다.

나는 중학생인 형님과 짝을 지어 관망(觀望)하면서

일심(一心)으로 상대가 될 대항자(對抗者)를 찾는다.

 

마츰 호기(好氣)어린 짝놈을 찾는다.

전쟁을 걸어오면은 사야한다네.

붙기는 붙었다.

 

날고 있는 연을 교차해서 대항자(對抗者)의 연을 날리면 이긴다.

벌써 대한자의 연은 바닷바람에 높이도 솟는다.

나는 목을 한참 들면서 꺼질 때까지 바라볼 뿐이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형님과 나의 전승을 기도하면서

집에서 대기하셨겠지만은

그 어머니, 지하(地下)에 계신지 10년도 넘는다

 

 


 

 

천상병 시인 / 오월의 신록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두살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천상병 시인 / 우리집 뜰의 봄

 

 

오늘은 91년 4월 25일

뜰에 매화가 한창이다.

라일락도 피고

홍매화도 피었다.

 

봄향기가 가득하다.

꽃송이들은

자랑스러운 듯

힘차게 피고 있다.

 

봄 기풍(氣風)이 난만하고

천하(天下)를 이룬 것 같다.

 

 


 

 

천상병 시인 / 일을 즐겁게

 

 

모든 일을

이왕 할 바에야

아주 즐겁게 하자.

 

일하는데

괴로움을 느끼면

몸에도 나쁘고......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

일의 능률도 오르고

몸에도 아주 좋으니......

 

 

그러니

즐거운 마음과

건강한 생각으로 일을 합시다.

 

 


 

 

천상병 시인 / 잠모습 아내

 

 

어이없게 어이없게 깊게 짙게

영! 영! 여천사 같구나야!

시간 어이없게 이른 새벽!

8월 19일 2시 15분이니

모름지기 이러리라 짐작 되지만

목순옥 아내는

다만 혼자서 아주 형편없이 조그만

찻집 귀천을 경영하면서

다달이 이십만원 안팎의 순이익(純利益)올려서

충분히 우리 부부와 동거하고 있는

어머니(사실은 장모님)와 조카

스무살짜리 귀엽기 짝없는 목영진

애기 아가씨와

합계 네사람 생활, 보장해 주고

또 다달이 약 오만원 가량

다달이 저금하니

우리 네 가족 초소시민층(超小市民層)밖에 안돼도

그래도 말입니다!

나는 담배 - 그것도 내 목구멍에

제일 순수한 담배 골라 피울 수 있고요!

 

술은 춘천의료원 511호실에서

보낸 날수로 따져서 말해요!

1월 20일에서 1월 17일까지니

담배 더러 피우긴 했었지만

그러니 불법(不法)적으로

피운긴 했어도

간호원이나 기분 언짢고 그래서 지금 금연중이고

소설가인 이외수(李外秀)씨와 이름잊은 제수씨가 퇴원때

집에 와서

한달동안 지기들 집에서 머물러 달라고 부부끼리 간청했지만......

다 무시하고

어머니와 영진이가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직귀(直歸)했습니다!

아내야 아내야 잠자는 아내야!

그렇잖니 그렇잖니.

 

 


 

 

천상병 시인 / 젊음을 다오!

 

 

나는 올해 환갑을 지냈으니

젊음을 다오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도 모르게

젊음이 다 가버렸으니

어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내가 젊어서도

시인이 되겠지만

그러나 너무나 시일이 짧다.

 

다시 다오 청춘을!

그러면 나는 뛰리라.

마음껏 뛰리라.

 

 


 

 

천상병 시인 / 주막(酒幕)에서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신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쥬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 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천상병 시인 / 주일 2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천상병 시인 / 집.4

 

 

내 방에는, 허름해도 가치있는

책이 다소 잇는데 읽으며 또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중학생의 국어교과성에서 많은 걸 배운다.

역사도 지리도 자전(自傳)등 여러 가지다.

얼마전날에는 손문(蓀文)의 자전을 읽었는데.......

초기혁명(初期革命)에는 열번도 더 실패하더군......

 

한번 두 번 실패는 단 벌꿀이다.

목숨걸고 하는 초기혁명(初期革命)도

열번째나 되니, 인명재천(人命在天)이 아닌가......

 

 


 

 

천상병 시인 / 집.5

 

 

옛날엔 옥상에 끽하면 올라갔는데

이제는 열쇠가 없으니 불가능(不可能)이다.

형도 없고 조카들도 없으니 셋집뿐이다.

 

소인(小人)들 하고는 말하기도 귀찮다.

그것은 오래전부터의 나의 습관이다.

뺏기기도 싫고 잃기도 싫은 나의 성격이야.

 

그래도 열쇠없는 대인(大人)이라니

그림의 떡이요 미술품(美術品)의 여상(女桑)이다.

낮잠도 안오고 망망(茫茫)한 대해(大海)와 같다.

 

  


 

천상병 [千祥炳, 1930.1.29 ~ 1993.4.28] 시인

1930년 일본 효고현(兵庫県)에서 출생.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신  담임교사이던 시인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誌에 초회 추천. 1951년 《문예》誌에  평론  〈나는  부하고 저항 할 것이다〉를 발표하며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주막에서』(민음사, 1979)와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답게, 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민음사) 등이 있음. 1993년 숙환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