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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인환 시인 / 가을의 유혹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6.

박인환 시인 / 가을의 유혹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露臺)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차처럼 또는

낙엽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는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廢園)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고 있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 양복과 목관 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전원

 

 

1

 

홀로 세우는 밤이었다 지난 시인의 걸어온 길을

나의 굼길에서 부딪혀 본다

적막한 곳엔 살 수 없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모여들고

한칸 방은 잘 자리도 없이

좁아진다

밖에는 우수수 낙엽소리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2

 

?토의 냄새를 산마루에서

지킨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지금 쳐다보기도 싫은

기울어져 가는

만하 전선위에서

제비들은 바람처럼

나에게 작별한다

 

3

 

찾아든 고독 속에서

가까이 들리는 바람소리를 사랑하다

창을 부수는 듯 별들이 보였다

7월의 저무는 전원

시인이 죽고 괴로운 세월은

어디론지 떠났다

비 나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여름의 호흡이 쉴새없이

눈앞으로 지낸다

 

4

 

절름발이 내 어머니는

삭풍에 쓰러진 고목 옆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 지나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마차가 넘어간 언덕에 앉아

지평에서 걸어오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생각이 타오르는 연기는 마을을 덮는다

 

 


 

박인환[朴寅煥, 1926.8.15~1956.3.20] 시인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上東里)에서 출생. 낙원동 입구에서 서점 「마리서사(馬莉書舍)」를 경영. 이때부터 김기림·오장환·김광균(金光均) 등 선배시인들과 알게 되었고, 김수영(金洙瑛)·김경린(金璟麟)·김병욱(金秉旭) 등과 교우관계를 맺음. 1946년 시 「거리」발표. 1947년 시 「남풍」, 산문 「아메리카 시논」을 「신천지」에 발표. 1948년 「마리서사」 경영을 그만 둠.

4월에 동인지 「신시론」창간에 김경린 등과 함께참여. 진명 출신의 이정숙(李丁淑)과 덕수궁 앞뜰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뿌림. 1956년 작고후 시집 『목마와 숙녀』와 『박인환 전집』이 간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