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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인환 시인 / 태평양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4.

박인환 시인 / 태평양에서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도 없고 태양도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둠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은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가?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데키에 매달려

기념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해라

 

 


 

 

박인환 시인 / 어린 딸에게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개월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와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벼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럼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탈환전

제트기 박겨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각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를 위해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朴寅煥, 1926.8.15~1956.3.20] 시인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上東里)에서 출생. 낙원동 입구에서 서점 「마리서사(馬莉書舍)」를 경영. 이때부터 김기림·오장환·김광균(金光均) 등 선배시인들과 알게 되었고, 김수영(金洙瑛)·김경린(金璟麟)·김병욱(金秉旭) 등과 교우관계를 맺음. 1946년 시 「거리」발표. 1947년 시 「남풍」, 산문 「아메리카 시논」을 「신천지」에 발표. 1948년 「마리서사」 경영을 그만 둠.

4월에 동인지 「신시론」창간에 김경린 등과 함께참여. 진명 출신의 이정숙(李丁淑)과 덕수궁 앞뜰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뿌림. 1956년 작고후 시집 『목마와 숙녀』와 『박인환 전집』이 간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