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 / 출생기(出生記)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 2년!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多彩)하여 지붕에 박넌출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잉태(孕胎)한 어머니는 짐즛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못댁 제삿날밤 열 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繁文縟禮)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新月)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盤)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
유치환 시인 / 치자꽃
저녁 어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가는 고향의 슬프디슬픈 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天幕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유치환 시인 / 항가새꽃
어느 그린 이 있어 이같이 호젓이 살 수 있느니 항가새꽃 여기도 좋으이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내 여기도 좋으이 하세월 가도 하늘 건너는 먼 솔바람 소리도 내려오지 않는 빈 골짜기 어느 적 생긴 오솔길 있어도 옛같이 인기척 멀어 멧새 와서 인사 없이 빠알간 지뤼씨 쪼다 가고 옆엣 덤불에 숨어 풀벌레 두고두고 시름없이 울다 말 뿐 스며오듯 산그늘 기어내리면 아득히 외론 대로 밤이 눈감고 오고 그 외롬 벗겨지면 다시 무한 겨운 하루가 있는 곳 그대 그린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여기도 즐거웁거니 아아 날에 날마다 다소곳이 늘어만 가는 항가새꽃 항가새꽃
유치환 시인 /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 해바라기들 새에 서서 나도 해바라기가 되려오.
황금사자(黃金獅子) 나룻 오만(傲慢)한 왕후(王候)의 몸매로 진종일 찍소리 없이 삼복(三伏)의 염천(炎天)을 노리고 서서 눈부시어 요요히 호접(蝴蝶)도 못오는 백주(白書)! 한 점 회의(懷疑)도 감상(感傷)도 용납치 않는 그 불령(不逞)스런 의지(意志)의 바다의 한 분신(分身)이 되려오.
유치환 시인 / 향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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