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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한하운 시인 / 향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4.

한하운 시인 / 향수

 

 

내 고향 함흥은

수수밭 익는 마을

누나가 시집갈 때

가마타고 그 길로 갔다

내 고향 함흥은

능금이 빨간 마을

누나가 수줍어할 때

수수밭은 익어갔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한하운 시인 / 여인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한하운 시인 / 무지개

 

 

무지개가 섰다.

무지개가 섰다.

 

물 젖은 하늘에

거센 햇살의 프리즘 광선 굴절로

천연은 태고의 영광 그대로

영롱한 七彩의 극광으로

하늘과 하늘에 穹 한 다리가 놓여졌다.

 

무지개는 이윽고 사라졌다

아쉽게

인간의 영혼의 그리움이

행복을 손모아 하늘에 비는 아쉬움처럼

사라진다 서서히.....

 

만사는 무지개가 섰다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었다.

 

 


 

 

한하운 시인 / 삶

 

 

지나가 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왔다.

 

여기 있는 것 남은 것은

욕(辱)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옛날에 서서

우러러 보던 하늘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가마는.

 

아 꽃과 같은 삶과

꽃필 수 없는 삶과의

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

 

잠깐이라도 이 낯선 집

추녀 밑에 서서 우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다.

 

 


 

한하운 [韓何雲, 1920.3.20 ~ 1975.2.28] 시인

본명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생. 중국 베이징[北京]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 함남 ·경기 도청 등에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고,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