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인 / 손가락 한 마디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한하운 시인 / 벌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한하운 시인 / 봄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 이른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밝안 모가지 땅속에서도 옴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울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한하운 시인 / 어머니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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