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 / 사향(思鄕)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어 와 내 대신 내 자리에 살째기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 양 밀어 놓고 가만히 일어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暮色)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 같은 등불 두엇!
유치환 시인 / 산사(山寺)
염(念)하여도 염하여도 무연(無緣)하여 솔바람 유현(幽玄)한 탄식에 산그늘 사이 기왓골 외로이 늙고
어두운 법당 안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일월이 낙엽처럼 쌓이는 속에 적막히 앉아 기다리시고
대웅전 돌아가면 이름도 까마득한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별 바른 앞뜰의 황국(黃菊)도 쓸쓸히 인간의 애환을 여민 채
먼 마을의 인정스런 낮닭 소리도 안 들리고 정적도 그양 법열(法悅)이어서 아끼듯 들려오는 조왕당 부엌소리
유치환 시인 / 산처럼
오직 한 장 사모의 푸르름만을 우러러 눈은 보지도 않노라 귀는 듣지도 않노라
저 먼 땅끝 닥아 솟은 산, 너메 산, 또 그너머 가장 아슬히 지켜 선 산 하나-- 아아 그는 나의 영원한 사모에의 자세
무수히 침부하는 인간의 애환의 능선 넘어 마지막 간구의 그 목마른 발돋움으로 계절도 이미 絶한 苛熱에 항시 섰으매
이 아침날에도 그 아린 孤高를 호궤받듯 정결히도 백설 신령스리 외로 입혀 있고
내 또한 한 밤을 전전(轉輾)없이 안식함을 얻었음은 그 매운 외롬 그같이 설은 축복 입더메서랴
아아 너는 나의 영원-- 짐짓 소망없는 저자에 더불어 내 차라리 어리숙게 살되
오직 너에게의 이 푸르름만을 우럴어 귀는 듣지 않노라 눈은 보지 않노라
유치환 시인 / 석경(夕景)
달 희고 잔양(殘陽) 가지 끝에 남아 걸려 참새떼 마을에 돌아와 아이들처럼 법석대는 저녁은 땅거미같이 은밀히 내 오랜 가향(家鄕) 생각에 늙었음이여
유치환 시인 / 세월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雨氣 짙은 양이면 자욱 기어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유치환 시인 / 수(首)
십이월의 北滿(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가성) 네거리에 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한천)에 模糊(모호)히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除(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烈(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暝目(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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