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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유치환 시인 / 사향(思鄕)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2.

유치환 시인 / 사향(思鄕)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어 와

내 대신 내 자리에 살째기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 양 밀어 놓고

가만히 일어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暮色)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 같은 등불 두엇!

 

 


 

 

유치환 시인 / 산사(山寺)

 

 

염(念)하여도 염하여도 무연(無緣)하여

솔바람 유현(幽玄)한 탄식에

산그늘 사이 기왓골 외로이 늙고

 

어두운 법당 안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일월이 낙엽처럼 쌓이는 속에

적막히 앉아 기다리시고

 

대웅전 돌아가면

이름도 까마득한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별 바른 앞뜰의 황국(黃菊)도

쓸쓸히 인간의 애환을 여민 채

 

먼 마을의 인정스런 낮닭 소리도 안 들리고

정적도 그양 법열(法悅)이어서

아끼듯 들려오는 조왕당 부엌소리

 

 


 

 

유치환 시인 / 산처럼

 

 

오직 한 장 사모의 푸르름만을 우러러

눈은 보지도 않노라

귀는 듣지도 않노라

 

저 먼 땅끝 닥아 솟은 산,

너메 산, 또 그너머

가장 아슬히 지켜 선 산 하나--

아아 그는 나의 영원한 사모에의 자세

 

무수히 침부하는 인간의 애환의 능선 넘어

마지막 간구의 그 목마른 발돋움으로

계절도 이미 絶한 苛熱에 항시 섰으매

 

이 아침날에도

그 아린 孤高를 호궤받듯

정결히도 백설 신령스리 외로 입혀 있고

 

내 또한 한 밤을

전전(轉輾)없이 안식함을 얻었음은

그 매운 외롬 그같이 설은 축복 입더메서랴

 

아아 너는 나의 영원--

짐짓 소망없는 저자에

더불어 내 차라리 어리숙게 살되

 

오직 너에게의 이 푸르름만을 우럴어

귀는 듣지 않노라

눈은 보지 않노라

 

 


 

 

유치환 시인 / 석경(夕景)

 

 

달 희고

잔양(殘陽) 가지 끝에 남아 걸려

참새떼 마을에 돌아와

아이들처럼 법석대는 저녁은

땅거미같이 은밀히

내 오랜 가향(家鄕) 생각에 늙었음이여

 

 


 

 

유치환 시인 / 세월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雨氣 짙은 양이면

자욱 기어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유치환 시인 / 수(首)

 

 

십이월의 北滿(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가성) 네거리에

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한천)에 模糊(모호)히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律(율)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除(제)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烈(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暝目(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유치환(柳致環, 1908. 7.14 ~ 1967. 2.13) 시인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 동래보고 졸업. 연희전문에서 수학. 《문예월간》 1931년 12월호에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루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음. 장응두. 최상규  등과  동인지 『생리』를 발행.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수상. 196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