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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유치환 시인 / 매화나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1.

유치환 시인 / 매화나무

 

 

겨우 소한(小寒)을 넘어선 뜰에 내려

매화나무 가지 아래 서서 보니

치운 공중에 가만히 뻗고 있는

그 가녀린 가지마다에

어느새 어린 꽃봉들이 수없이 생겨 있다

 

밤이며는 내가 새벽마다 일어 앉아

싸늘한 책장을 손끝으로 넘기며 느끼는

엊저녁 그 모색(暮色) 속 한천(寒天) 아래 까무러치듯

외로이도 얼어붙던 먼 山山들!

그러면서도 무엔지

아련하고도 따뜻이 마음 뜸 돌던 느낌을

이 가지들도 느껴 왔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표연히 집을 나서

어디고 먼 바닷가에나 가서

그 바다의 양양(洋洋)함을 바라보고

홀로의 생각에 젖었다 오?음!

이런 수럿한 심정도 어쩌면

저 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적에

내가 느껴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매운 바람결이 몰려 닿을 적마다

어린 꽃봉들을 머금은 가녀린 가지는

외로움에 스스로 다쳐서는 안 된다! 고

살래살래 타일르듯 흔들거린다

 

 


 

 

유치환 시인 / 목숨

 

 

하나 모래알에

삼천 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수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한 이 즐거움이여

 

 


 

 

유치환 시인 / 바람에게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유치환 시인 /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시인 / 별

 

 

어느 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유치환 시인 / 병처(病妻)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유정(有情)의 거미줄을 관념(觀念)하며

요요(遙遙)한 태허(太虛) 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星芒)을 지키며

소조(蕭條)히 지저(地底)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蕭條)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만약 그대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즘생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유치환(柳致環, 1908. 7.14 ~ 1967. 2.13) 시인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 동래보고 졸업. 연희전문에서 수학. 《문예월간》 1931년 12월호에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루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음. 장응두. 최상규  등과  동인지 『생리』를 발행.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수상. 196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