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유치환 시인 / 깃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0.

유치환 시인 /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시인 / 꽃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팔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유치환 시인 / 나무의 노래

 

 

외로움, 그것이 외로운 것 아니란다

그것을 끝내 견뎌남이 진실로 외로운 것

세월이여, 얼마나 부질없이 너는

내게 청춘을 두고 가고 또 앗아가고

그리하여 이렇게 여기에 무료히 세워 두었는가

 

무심히 내게 와 깃들이는 바람결이여, 새들이여

너희 마음껏 내게서 즐검을 누리고 가라

그러나 마침내 너희는 나의 깊은 안에는 닿지 않는것

 

별이여, 오직 나의 별이여

밤이며는 너를 우러러 드리는 간곡한 애도에

나의 어둔 키는 일곱 곱이나 자라 크나니

허구한 낮을 허전히

이렇게 오만 바람에 불리우고 섰으매

이 애절한 나의 별을 지니지 않은 줄로 아느냐

 

아아 이대로 나는 외로우리라, 끝내 정정하리라

 

 


 

 

유치환 시인 /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을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치환 시인 / 노송

 

 

아득한 기억의 연령을 넘어서 여기

짐승같이 땅을 뚫고 융융히 자랐나니

이미 몸둥이는 용의 비늘을 입고

소소히 허공을 향하여 여울을 부르며

세기의 계절 위에 오히려 정정히 푸르러

전전 반축하는 고독한 지표의 일변에

치어든 이 불사의 원념을 알라.

 

 


 

 

유치환 시인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유치환(柳致環, 1908. 7.14 ~ 1967. 2.13) 시인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 동래보고 졸업. 연희전문에서 수학. 《문예월간》 1931년 12월호에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루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음. 장응두. 최상규  등과  동인지 『생리』를 발행.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수상. 196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