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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영랑 시인 / 숲향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9.

김영랑 시인 / 숲향기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조광, 1939. 1

  

 


 

 

김영랑 시인 / 미움이란 말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땅거미

 

 

가을날 땅거미 아름풋한 흐름 위를

고요히 실리우다 휜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라빛의 낡은 내음이요

임의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오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다 못 돌아오는

머언 지난 날의 놓친 마음


영랑시선, 정음사, 1949

 

 


 

 

김영랑 시인 / 마당 앞 맑은 새암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무너진 성터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본명은 김윤식(允植). 영랑(永郞)은 아호.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청산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향리에 머물렀다. 광복 후 오랫 동안의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수복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세 단계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과 자선시집 <영랑시선>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