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 / 숲향기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조광,
1939. 1
김영랑 시인 / 미움이란 말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땅거미
가을날 땅거미 아름풋한 흐름 위를 고요히 실리우다 휜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라빛의 낡은 내음이요 임의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오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다 못 돌아오는 머언 지난 날의 놓친 마음
영랑시선, 정음사, 1949
김영랑 시인 / 마당 앞 맑은 새암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무너진 성터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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