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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영랑 시인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8.

김영랑 시인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두견(杜鵑)

 

 

울어 피를 토하고 뱉은 피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으로 지친 작은새

너는 넓은 세상에 설음을 피로 새기려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 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젖한 이 새벽을, 송구한 네 울음

천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가 어린 별들 바르르 떨리겠구나...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릴것을...

아니 울고는 차마 죽어 없으리오

불행의 넋이여!

우지진 진달래 와지직 이 삼경의 네 울음.

 

 


 

 

김영랑 시인 / 두견(杜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붐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물소리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수풀 아래 작은 샘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녁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꺼나


영랑시선, 정음사, 1949

 

 


 

 

김영랑 시인 / 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본명은 김윤식(允植). 영랑(永郞)은 아호.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청산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향리에 머물렀다. 광복 후 오랫 동안의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수복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세 단계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과 자선시집 <영랑시선>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