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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영랑 시인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7.

김영랑 시인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뻔질한

은 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론 도론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내 마음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기인뜻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혼자 마음을......

 

아! 내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마음에 때때로 어리누는 띠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밤 고이맺는 이슬같은 보람을

보배인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김영랑 시인 /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뉘 눈결에 쏘이었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봉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일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여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어쩌면 이런 시구절이 나오는지

새삼 또 새삼스럽게도 그 감성의 풍부함에 놀랍습니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달

 

 

사개를 인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우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毒)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毒)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毒)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毒)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뒤!'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 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영랑시선, 정음사, 1949

 


 

본명은 김윤식(允植). 영랑(永郞)은 아호.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청산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향리에 머물렀다. 광복 후 오랫 동안의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수복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세 단계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과 자선시집 <영랑시선>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