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1934년 〈문학〉 4월호에 발표되었고, 1935년 시문학사에서 펴낸 〈영랑시집〉에 제목 없이 45번이란 숫자로 실려 있다. 모란으로 상징되는 봄에 대한 기다림과 봄을 잃어버릴 허탈감을 노래한 시로, 전통적 리듬과 사투리가 잘 어울려 세련된 언어감각을 보여준다.
김영랑 시인 / 四行詩
1 임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2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3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4 저녁 때 저녁 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러 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5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만 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6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마음 기여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 끝까지
7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보실 가을눈(眼) 이 그 나래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8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음실 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김영랑 시인 / 5월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만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김영랑 시인 / 5월 아침
비 개인 5월(五月)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지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만은
이 아침 새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그 보금자리에 찌찌찌 소리내는 잘새의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 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蒼空)을 흔드오 자랑찬 새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 버렸대서야 불혹(不惑)이 자랑이 아니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魂)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익(靜謚)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少年)인가 보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中年)이고 내사 불혹(不惑)을 자랑튼 사람 영랑시선, 정음사, 1949
김영랑 시인 / 가늘한 내음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 허리에 슬리는 보라빛
오! 그 수심뜬 보라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윈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처얼썩 갯물이 놓이듯 얼컥 이ㅡ는 후끈한 마음
아니 후끈한 내음 내키다 마아는 서언한 가슴에 그늘이 도오나니 수심 띠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라빛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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