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바다
바다가 와락 달려든다. 내가 앉은 모래 위에...
가슴으로 벅찬 가슴으로 되어 달려 오는 푸른 바다!
바다는 내게로 오는 바다는 와락와락 거센 물결 날 데리러 어디서 오나!
귀가 열려 머언 바다에서 오는 소리에 자꾸만 내 귀가 열려
나는 일어선다. 일어서며 푸른 물 위로 걸어 가고 싶다. 쩔벙쩔벙 머언 바다 위로 걸어 가고 싶다.
햇볕 함빡 받고 푸른 물 위를 밟으며 오는 당신의 바닷길...
바닷길을 나는 푸른 바다를 밟으며 나도 먼 당신의 오는 길로 걸어 가고 싶다.
작자의 말 -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특수적인 요소를 기교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기교란 말은 단순한 언어의 취급이나 조직 같은 그런 외적 공작일반을 말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든지 특수적인 어느 한 작가에 있어서만 가능한 내면적인 기교를 의미함이다. 즉,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독자적 양식'을 말함이니 이 어느 한 작가에 있어서만 가능한 개인 특유의 개성적인 것을 '개성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박두진 시인 / 갈대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智慧)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沈黙)하고, 언어(言語)는 이슬 방울, 사상(思想)은 계절풍(季節風),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永遠).-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鮮血)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絶叫)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沈黙)하면 갈대는 고독(孤獨).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 파스칼의 [팡세]에 있는 그 유명한 구절,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갈대"로서의 지성인은 추위가 "침묵"할 때 "잎에는 피가 묻어" 사회 정의를 "절규"하게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도 내면 세계에 잠긴 종교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작자는 자기의 시작 태도에 관하여 "문학과 종교를 나의 자아 속에서 하나로 하려고 애써왔습니다"고 말한 바 있다.
박두진 시인 /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해, 청만사, 1949
[상아탑] 6호(1946.5) 수록. 새 인간성 및 이상적 우주 구현을 노래했다. 이 작품을 가리켜 조연현은 "한국 서정시가 이룰 수 있는 한 절정을 노래했다"고 평했다. 주제는 순수와 광명과 평화에의 의욕.
조연현의 평 - "자기가 부르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노래해 버리고 말은 감이 없지않을 만큼 절정에까지 도달해 버리고 말았다. 여기엔 적어도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노래불리워지고 있다. 씨는 이 한편으로써 유언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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