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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목월 시인 / 가정(家庭)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4.

박목월 시인 / 가정(家庭)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박목월 시인 / 강나루 밀밭길의 나그네

 

 

참으로

인생이 무엇임을

누가 알진대

실패할수록

더욱 풍부할 수도 있는 인생을

나의 시에는

눈물이 얼어 눈으로 변하고

어린것은

눈물 자국이 마른 얼굴로

잠들었다.

이런 밤에

그가 꾸는 꿈의 내용을

나는 모르지만

또한 알지만

나의 시는

허전하게 서럽고

연필은

눈 오는 소리로 사각거리며

벌판을 달린다

 

<목판화> 중에서

 

 


 

 

박목월 시인 / 나그네

 

 

강(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朴木月, 1915.1.6~1978.3.24] 시인

본명은 영종(泳鍾). 1916년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자람.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 졸업. 정지용(鄭芝溶)에 의해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과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그밖의 저서로는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음.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및 1963년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역임.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 1978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