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산맥을 간다
얼룽진 산맥(山脈)들은 짐승들의 등빠디 피를 뿜듯 치달리어 산등성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 빛 이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포효(咆哮)는 절규(絶叫).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을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해가 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해가 한 덩이.
미친 듯 밀려 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문장]에 박두진을 추천한 정지용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격찬하고 있다. "박두진 군, 당신의 시를 시우(詩友) 소운(素雲)한테 자랑삼아 보였더니, 소운이 경험하는 산의 시를 포기하노라 합디다. 시를 무서워할 줄 아는 시인을 다시 무서워할 것입니다. 유유히 펴고 앉은 당신의 시의 자세는 매우 편하여 보입니다."
박두진 시인 / 낙엽송
가지마다 파아란 하늘을 받들었다. 파릇한 새순이 꽃보다 고옵다.
청송이라도 가을 되면 홀홀 낙엽진다 하느니 봄마다 새로 젊는 자랑이 사랑옵다.
낮에는 햇볕 입고 밤에 별이 소올솔 내리는 이슬 마시고,
파릇한 새순이 여름으로 자란다.
[문장]8호(1939.9) 수록.
* 자연을 관조하고 자연과 친화하면서 그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주제는 생명의 경이와 그 의지.
박두진 시인 / 도봉(道峯)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시집[청록집](1946) 수록. 일제 말기의 암담한 현실과 구원을 바라는 외로운 심경을 노래했다. 전반부는 서경. 후반부는 서정. 주제는 삶의 쓸쓸함과 고독감.
작자 자신의 말 - "여기에 붙인 '그대'는,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민족이거나, 여호와거나, 그 모두이거나, 어느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느것에도 나는 절절할 수가 있었던 때요, 그만큼 내 시에서는 가장 포풀러하고, 서정성이 많고, 감미롭기까지 한 서러움을 지니고 있는 시다."
박두진 시인 / 숲
푸른 넝쿨들은 늙은 정정한 나무를 감으며 더 높은 하늘을 만져 보기 위하여 위으로 위으로 손을 뻗쳐 기어 오르고
골짜구니 샘물은 넘쳐 흘러 언젠가 꿈꾸던 먼 망망한 바다의 아침의 해후를 위하여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지줄되며 내려간다.
나래 고운 새들은 오늘의 사랑과 어쩌지 못할 슬픔과 즐거움을 감추지 못해 가지에서 잔 가지로 날으며 울고
습습한 그늘 나무와 그늘과 나무 그늘 푸섶에선 달팽이는 이제야 뿔을 쭝겨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늦으막한 여행길에 오르고
배암은 그늘에 숨어 사래쳐 도사리고 누군가를 저주하고 혀를 갈라 날름대고 달변을 연습하고 독의 꽃을 마련한다.
양지쪽 다람쥐는 그 저지른 스스로의 잘못을 꾸며서 가리우기 위하여 알랑달랑 바쁘고
풀버러지는, 풀버러지는 낮에도 밤에도 다만 가늘고 선량한 노래의 선율을 울릴 뿐이다.
숲은, 밤에 찬란히 이는 머리 위 하늘의 별들이 내려 주는 촉촉한 이슬에 지혜가 늘고
갑자기 때로 불어 치는 바람과 비바람과 폭풍과 번갯불의 시련에 의지가 굳는다.
숲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쓰다듬어 애무하며 숲은 늘 위로 들어 소망하고 고개 숙여 명상한다. 무릎 꿇어 기도한다.
언제나 먼 푸른 바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총총하고 장엄한 별이 박힌 하늘에로 푸른 꿈을 준다.
[청록집](1946) 수록. 자연계의 숲을 통해서 인간 세계의 생태를 노래하고 있다. 주제는 숲이 지닌 포용력과 생명력 및 그 소망.
작자의 말 - "산을 찾고, 산에 숨어 살고, 그리고 안으로 울고, 그러한 심정을 얼마간 시로써 미화시키는 것으로 자위를 삼았다 - 그리하여 도피도 장했고, 서러움을 노래하는 것도 하나의 지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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