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 / 가마귀의 노래
내 오늘 병든 즘생처럼 치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호올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야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가마귀떼 날러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 것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다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서 살어 오욕(汚辱)을 팔어 인색(吝嗇)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증오하야 해도 나오지 않고 날새마자 질타하듯 치웁고 흐리건만 그 거리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노니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마귀 모양 이대로 황망한 벌 끝에 남루히 얼어붙으려 하노라
유치환 시인 / 고목
내 고궁(古宮) 뒤에 가서 보니 뉘 알려지도 않은 높다란 고목 있어 적막히 진일(盡日)을 바람에 불리우고 있었도다 그는 소경인 양 싹도 틀려지 않고 겨우살이 말라 얽힌 앙상한 가지는
갈리바의 머리깔처럼 오작(烏鵲)이 범하는대로 오오랜 고독에 무쇠같이 녹쓸어 종시 돌아옴이 없는 저 머나먼 자를 향하여 소소(嘯嘯)히 탄식하듯 바람에 울고 있었도다
유치환 시인 / 광야에 와서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유치환 시인 / 귀고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신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유치환 시인 / 그리우면
뉘 오는 이 없는 곬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곁에 송화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위돌 하나 기나긴 하로해 직하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호올로 숨겼기에 즐거워 고은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유치환 시인 /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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