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 / 북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영랑시선, 정음사, 1949
김영랑 시인 /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淸明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 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해진 내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낱 버러지로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김영랑 시인 / 풀 위에 맺혀지는
풀 위에 맺혀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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