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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한하운 시인 / 파랑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1.

한하운 시인 /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한하운 시인 / 하운(何雲)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두르네

산도 언덕도  나뭇가지도

 

여기라 뜬 세상

죽음에 주인이 없어 허락이 없어

이처럼 어쩔 줄 몰라 서두르는가

 

매양 벌려둔 저 바다인들

풍덩실 내 자무러지면

수많은 어족(魚族)들의 원망이 넘칠 것 같다.

 

썩은 육체 언저리에

네 헒과 균과 비(悲)와 애(哀)와 애(愛)를 엮어

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 보고파진다.

 

아 구름되고파

바람이 되고파

어이없는 창공에

섬이 되고파.

 

 


 

 

한하운 시인 / 귀향(歸鄕)

 

 

고향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은

 

달랠 길 없어

한때의 잘못된 죄는

꽃도 없는 깜깜한 감옥 속에

벌을 몸으로 치르고

 

이제 법조문보다

자유로운 고향길을 가는데

 

산천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고향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산에서 들에서

뻐꾸기가

 

누구를 부르는가

누구를 찾는가

내 마음같이 흔건히 울고 있는데

 

산천은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고향도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정말

법조문이 무엇인가

자유가 무엇인가

인생도 알 듯하는데

 

산천초목은 엽록소 싱싱하게 푸르러

하늘과 바닷빛

아스라한 하늘 끝간 데

 

영원에서

영원으로

 

생명이 넘쳐흐르고……

 

 


 

 

한하운 시인 / 전라도 길 49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한하운(韓何雲) 1920.3.20-1975.2.2

 

<연보>

 

▲1919 : 함남 함주군(咸州郡) 동촌면(東村面) 쌍봉리(雙峰里)에서 한종규(韓鍾奎)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가계(家系)는 3대를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으로 지방 지주였음.

▲1925 : 함흥으로 이사

▲1926 :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 입학. 내내 우등생, 음악과 미술에 뛰어났음.

▲1931 : 봄에 몸이 무겁고 붓기 시작함(나병 발병의 시초)

▲1932 : 보통학교 졸업. 이리 농림학교(裡里農林學校) 입학, 수의축산과(獸醫畜産科) 전공.

▲1934 : 시와 소설을 습작. 순정의 여인(당시 여학생) R을 사귐.

▲1936 : 봄, 경성대부속병원(京城大附屬病-현, 서울대 부속병원)서 나병 확정 진단.

▲1937 : 이리 농림학교 졸업. 일본 동경 성혜(成蹊)고등학교 입학.

▲1939 : 동경 성혜고등학교 2년 수료, 나병이 악화되어 귀국 요양. 10월, 중국 북경으로 감.

▲1941 : 중국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畜牧學系) 입학.

▲1943 : 동 농학원 졸업, 귀국.

▲1944 : 함경 남도 도청 축산과 근무. 5월, 도내 장진군으로 의원(依願) 전근. 가을에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

▲1945 : ㆍ봄, 나병 악화. 관직을 사직, 함흥 중앙동으로 귀가, R의 도움을 받아가며 치료. 이 때부터 본명인 '태영(泰永)'을 버리고 '하운(何雲)'을 씀. 문학 공부에 전념.  ㆍ8ㆍ15 광복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점 책장수ㆍ[건국서사](建國書肆) 운영.

▲1946 : 3월 13일, 함흥 학생데모사건에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풀려남. 모친 사망.

▲1949 : ㆍ[신천지] 4월호에 <나시인 한하운 시초>(癩詩人 韓何雲詩抄)라 하여 시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외 12편이 실리게 됨. 첫시집 <한하운 시초>(정음사) 간행(시 26편 수록) ㆍ8월,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정착촌인 하천 부락(河川部落)에 입주.

▲1950 : 3월, 경기도 부평 소재 나환자 정착촌인「성계원」으로 이주, 자치회장에 선임됨.

▲1952 : 5월, 부평에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창설, 원장이 됨.

▲1953 : ㆍ경기도 용인에 [동진원](東震園) 창설. ㆍ6월, 재판 <한하운 시초>에 5편 추가 간행. 8월 이후 4개월간 신문과 국회에서 한하운의 시집과 관련, 그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벌어짐.ㆍ시 <보리피리>를 [서울 신문] 10월 15일자에 발표.

▲1954 : [대한한센총연맹] 결성, 위원장이 됨.

▲1955 : ㆍ3월 제2시집 <보리피리>(인간사) 간행.ㆍ시 <비창(悲愴)>을 [평화 신문] 4월 5일자에 발표.ㆍ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를 [희망] 5월∼57년 1월호에 걸쳐 연재.

▲1956 : ㆍ6월, <한하운시전집>(인간사) 간행 - 시 48편 수록. 수필 <나의 시작 수업(詩作修業)>을 [현대문학] 12월∼다음해 1월호에 걸쳐 발표.ㆍ시 <은진미륵불> 발표 - [자유문학] 12월호

▲1957 : 10월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간행(인간사)

▲1958 : ㆍ3월 [청운보육원] 설립, 원장.  ㆍ수필 <큰 코 다친다>(신문예 7월호), <인간에 대한 반항정신으로>(신문예 9월호), <어느날의 단상(斷想)>(신문예 12월호), < 사진에 대한 불연속적 관견(觀見)>(사진 문화 12호) 발표. ㆍ시 <인간 추방>(사진문화 12호) 발표.

▲1959 : ㆍ4월, <한하운 자작 시 해설집>(인간사) 간행. ㆍ시 <어느 velt는 살고 있다>(서울대 수의대학보 2집)ㆍ<벽화에 붙이는 글>(이리농림학교 새싹 6호) 발표. 수필 <영원한 민족의 서정시-소월의 시를 말한다>(신문예 8원호) 발표. ㆍ나병이 음성으로 진단받아 사회 복귀, [한미제역회사] 설립, 회장 취임.

▲1960 : ㆍ7월 서울 명동에 출판사 [무화문화사](無何文化社) 설립. ㆍ8월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신흥출판사) 간행. ㆍ수필 <첫사랑의 요오델가(歌)>(여원 3월호)ㆍ<방랑과 향수>(새벽 10월호) 발표.

▲1963 : 시 <세월이여>ㆍ<오마도>(이상 새빛), 수필 <애염전(愛染箋)>(야상) 발표.

▲1964 : 시 <포인세치아 꽃>ㆍ<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수필 <분뇨소> 발표

▲1965 : 수필 <물전쟁>(재무120호) 발표

▲1966 : 시 <회심(回心)>(인천신문)ㆍ<금유월(今六月)>(일요신문) 발표

▲1968 : 시 <올봄에도 꽃은 피는데>(새길 151호)ㆍ<장승>(사상계 5월호), 수필 <나의 소하(銷夏)>(새교실) 발표. 4월 간경화증 발병.

▲1969 : 시 <귀향>(새길 159호) 발표.

▲1970 : 시 <춘일지지>ㆍ<낙엽>ㆍ<춘와>ㆍ<파고다공원>ㆍ<포인세치아 꽃>(이상 시인), 시 <귀로>(교정 129호)ㆍ<어떤 인생>(새길 168호)ㆍ<자유당>(한국문학전집) 발표.

▲1973 :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시비(詩碑) 건립.

▲1975 : 3월 2일 인천시 십정동산 39번지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 경기도 김포군 계양산 장릉 공원 묘지 안장.

▲1977 : 유고시 <백목란 꽃>외 19편 [한국문학] 6월호에 발표됨.

▲1989 : 시집 <가도가도 황톳길>을「지문사」에서 간행

 

 


 

한하운 [韓何雲, 1920.3.20 ~ 1975.2.28] 시인

본명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생. 중국 베이징[北京]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 함남 ·경기 도청 등에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고,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