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인 / 자화상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쑈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한하운 시인 / 고향 55
원한이 하늘을 찢고 우는 노고지리도 험살이 돋친 쑥대밭이 제 고향인데 인목(人木)도 등 넘으면
알아보는 제 고향 인정이래도 나는 산 넘어 산 넘어 봐도 고향도 인정도 아니더라.
이제부터 준령(峻嶺)을 넘어넘어 고향 없는 마을을 볼 지 마을 없는 인정을 볼 지.
한하운 시인 / 나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벗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한하운 시인 / 생명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히려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과 같이 서러워라 한세상 한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한하운 시초(韓何雲詩抄)> : 한하운의 제1시집.
1949년 정음사(正音社) 간행. 책머리에 지은이의 필적과 나병으로 손가락이 잘린 수인(手印)이 찍혀 있으며, <전라도 길> <손가락 한 마디> <벌(罰)> <파랑새> <여인> 등 25편의 시와, 그를 시단에 소개한 이병철(李秉哲)의 해설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나병 환자라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 처절한 체험이 주요 내용이다. 체험 그 자체가 특이한 것으로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는 감상을 자제하고 객관화함으로써 표현효과를 더욱 높였다. 이 시집은 최초의 나환자 시집으로서 특이한 체험을 객관적인 어조로, 또는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집 <보리피리> 한하운(韓何雲)의 제2시집.
1955년 인간사(人間社) 간행. 4·6판. 90면. 1부「보리피리」에 <보리피리> <국토 편력> 등 5편, 2부「리라꽃 던지고」에 <부엉이> <무지개> 등 7편, 3부「인골적(人骨笛)」에 <비창(悲愴)> <추석달> 등 5편, 모두 17편이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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