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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유치환 시인 / 수선화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3.

유치환 시인 / 수선화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유치환 시인 / 슬픔은 불행이 아니다

 

 

모색(暮色)이 초연한 거리 끝에 서서

내가 이렇게 눈물짓는 것은

불행(不幸)하여서가 아니다.

 

시방 기척 없이 저무는 먼 산이며

거리 위에 아련히 비낀 초생달이며

자취 없이 사라지는 놀구름이며-

이들의 스스로운 있음과 그 행지(行止)의 뜻을

나의 목숨이 새기어 느낄 수 있음의

그 행복(幸福)에 흐느껴 눈물짓는 것이다.

 

- 진실로 진실로

의지없고 덧없음으로 하여

보배롭고 거룩한 이 꽃받침자리여.

 

 


 

 

유치환 시인 / 시인에게

 

 

영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정수리 위에 도사려

내가 목숨을 목숨함에는

솔개에게 모자보다 무연(無緣)한 것.

 

이 날 짐짓

나를 붙들어 놓지 않는 것은

살아 있으므로 살아야 되는 무가내한 설정에

비바람에 보듬긴 나무.

햇빛에 잎새같은 열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의 사무치는 뜨거움에

차라리 나는 가두 경세가(經世家).

 

마침내 부유의 목숨대로

보라빛 한 모금 다비되어

영원의 희멀건 상판을 기어 사라질 날이

얼마나 시원한 소진이랴.

 

그러기에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히 영원하라.

 

 


 

 

유치환 시인 /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유치환 시인 / 日月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유치환 시인 / 입추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유치환(柳致環, 1908. 7.14 ~ 1967. 2.13) 시인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 동래보고 졸업. 연희전문에서 수학. 《문예월간》 1931년 12월호에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루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음. 장응두. 최상규  등과  동인지 『생리』를 발행.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수상. 196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