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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유치환 시인 / 저녁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4.

유치환 시인 / 저녁놀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 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유치환 시인 / 죽(竹)

 

 

흙을 밀고 생겨난 죽순ㅅ적 뜻을 그대로

무엇에도 개의챦고 호올로 푸르러

구름송이 스쳐가는 창궁(蒼穹)을 향하야

오로지 마음을 다하는 이 청렴의 대는

노란 주둥이 새새끼 굴러들 듯 날러 앉으면

당장에 한그루 수묵(水墨)이 향그론 그림이 되고

푸른 달빛과 소슬한 바람이 여기 잠기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유현(幽玄)한 죽림의 일원이 되다

 

 


 

 

유치환 시인 / 죽음 앞에서

 

 

그 날 절벽같은 너의 죽음 앞에서

다시도 안 열릴 석문을 붙들고

아무리 불러 호곡한들

내 소리 네가 들으랴?

네 소리내게 들리랴?

 

 


 

 

유치환 시인 / 차창에서

 

 

달아 나오듯 하여

모처럼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새에 자리 잡고 앉으면

이게 마음 편안함이여

의리니 애정이니

그 습(濕)하고 거미줄 같은 속에 묻히어

나는 이렇게 살아 나왔던가

기름대 저린 ‘유 치환’이

이름마저 헌 벙거지처럼 벗어 팽가치고

나는 어느 항구의 뒷골목으로 가서

고향도 없는 한 인족(人足)이 되자

하여 명절날이나 되거든

인조 조끼나 하나 사 입고

제법 먼 고향을 생각하자

모처럼 만에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틈에 자리 잡고

홀로 차창에 붙어 앉으면

내만의 생각의 즐거운 외로움에

이 길이 마지막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라도

나는 하나도 슬퍼하지 않으리

 

 


 

 

유치환 시인 / 철로(鐵路)

 

 

사나운 정염(情炎)이 불을 품은

강철의 기관차 앞에

차가이 빛나는 두 줄의 철로는

이미 숙인(宿因) 받은 운명의 궤도가 아니라

이 거혼(巨魂)의

- 스스로 취하는 길

- 취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길

의지를 의지하는 심각한 고행의 길이로다

비끼면 나락(奈落)!

또한 빠르지 않으면 안 되나니

오오 한자락 자학에도 가까운 의욕과 열의의 길이로다

 

보라

처참한 폭풍우의 암야(暗夜)에 묻히어

말없이 가리치는 두 줄의 철로를

그리고 한결같이 굴러가는

신념의 피의 불꽃의 화차(火車)를

 

 


 

 

유치환 시인 / 춘신(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 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유치환(柳致環, 1908. 7.14 ~ 1967. 2.13) 시인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 동래보고 졸업. 연희전문에서 수학. 《문예월간》 1931년 12월호에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루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음. 장응두. 최상규  등과  동인지 『생리』를 발행.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수상. 196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