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 / 저녁놀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 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유치환 시인 / 죽(竹)
흙을 밀고 생겨난 죽순ㅅ적 뜻을 그대로 무엇에도 개의챦고 호올로 푸르러 구름송이 스쳐가는 창궁(蒼穹)을 향하야 오로지 마음을 다하는 이 청렴의 대는 노란 주둥이 새새끼 굴러들 듯 날러 앉으면 당장에 한그루 수묵(水墨)이 향그론 그림이 되고 푸른 달빛과 소슬한 바람이 여기 잠기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유현(幽玄)한 죽림의 일원이 되다
유치환 시인 / 죽음 앞에서
그 날 절벽같은 너의 죽음 앞에서 다시도 안 열릴 석문을 붙들고 아무리 불러 호곡한들 내 소리 네가 들으랴? 네 소리내게 들리랴?
유치환 시인 / 차창에서
달아 나오듯 하여 모처럼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새에 자리 잡고 앉으면 이게 마음 편안함이여 의리니 애정이니 그 습(濕)하고 거미줄 같은 속에 묻히어 나는 이렇게 살아 나왔던가 기름대 저린 ‘유 치환’이 이름마저 헌 벙거지처럼 벗어 팽가치고 나는 어느 항구의 뒷골목으로 가서 고향도 없는 한 인족(人足)이 되자 하여 명절날이나 되거든 인조 조끼나 하나 사 입고 제법 먼 고향을 생각하자 모처럼 만에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틈에 자리 잡고 홀로 차창에 붙어 앉으면 내만의 생각의 즐거운 외로움에 이 길이 마지막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라도 나는 하나도 슬퍼하지 않으리
유치환 시인 / 철로(鐵路)
사나운 정염(情炎)이 불을 품은 강철의 기관차 앞에 차가이 빛나는 두 줄의 철로는 이미 숙인(宿因) 받은 운명의 궤도가 아니라 이 거혼(巨魂)의 - 스스로 취하는 길 - 취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길 의지를 의지하는 심각한 고행의 길이로다 비끼면 나락(奈落)! 또한 빠르지 않으면 안 되나니 오오 한자락 자학에도 가까운 의욕과 열의의 길이로다
보라 처참한 폭풍우의 암야(暗夜)에 묻히어 말없이 가리치는 두 줄의 철로를 그리고 한결같이 굴러가는 신념의 피의 불꽃의 화차(火車)를
유치환 시인 / 춘신(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 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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