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려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誘惑)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1941. 11. 29.)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윤동주 시인 / 쉽게 쓰여진 시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윤동주 시인 /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對答)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윤동주 시인 /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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