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추야일경(秋夜一景)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어 있어서들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늘을 다지고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양념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밖에는 어디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삼천리문학, 1938. 1
백석 시인 / 칠월(七月) 백중
마을에서는 세 벌 김을 다 매고 들에서 개장취념을 서너 번 하고 나면 백중 좋은 날이 슬그머니 오는데 백중날에는 새악시들이 생모시치마 천진푀치마의 물팩치기 껑추렁한 치마에 쇠주푀적삼 항라적삼의 자지고름이 기드렁한 적삼에 한끝나게 상나들이옷을 있는 대로 다 내 입고 머리는 다리를 서너 켜레씩 들어서 시뻘건 꼬둘채댕기를 삐뚜룩하니 해 꽂고 네날백이 따배기신을 맨발에 바꿔 신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가는데 무썩무썩 더운 날에도 벌 길에는 건들건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허리에 찬 남갑사 주머니에는 오랜만에 돈푼이 들어 즈벅이고 광지보에서 나온 은장도에 바늘집에 원앙에 바둑에 번들번들하는 노리개는 스르럭스르럭 소리가 나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오면 약물터엔 사람들이 백재일 치듯 하였는데 붕가집에서 온 사람들도 만나 반가워하고 깨죽이며 문주며 섶가락 앞에 송구떡을 사서 권하거니 먹거니 하고 그러다는 백중 물을 내는 소내기를 함뿍 맞고 호주를하니 젖어서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꿈에도 못 잊는 붕가집에 가는 것이다 붕가집을 가면서도 칠월(七月) 그믐 초가을을 할 때까지 평안하니 집살이를 할 것을 생각하고 애끼는 옷을 다 적시어도 비는 시원만 하다고 생각한다
문장, 1948. 10
백석 시인 / 함남(咸南) 도안(道安)
고원선(高原線) 종점인 이 작은 정거장엔 그렇게도 우쭐대며 달가불시며 뛰어 오던 뽕뽕차(車)가 가이없이 쓸쓸하니도 우두머니 서 있다
햇빛이 초롱불같이 희맑은데 해정한 모래부리 플랫폼에선 모두들 쩔쩔 끓는 구수한 귀이리차[茶]를 마신다
칠성(七星)고기라는 고기의 쩜벙쩜벙 뛰노는 소리가 쨋쨋하니 들려오는 호수까지는 들죽이 한불 새까마니 익어 가는 망연한 벌판을 지나가야 한다
문장, 1939. 10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육사 시인 / 자야곡 (0) | 2019.07.22 |
---|---|
이상 시인 / 가정 외 1편 (0) | 2019.07.22 |
윤동주 시인 / 간 외 3편 (0) | 2019.07.21 |
유치환 시인 / 선한 나무 (0) | 2019.07.21 |
백석 시인 / 조당에서 외 2편 (0) | 2019.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