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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육사 시인 / 자야곡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2.

이육사 시인 / 자야곡(子夜曲)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내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문장>23호(1941)-

 

 


 

이육사 [李陸史, 1904.4.4~1944.1.16] 시인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다른 이름으로는 이활(李活), 이원삼(李源三), 육사(肉瀉), 이육사(李戮史), 이육사(二六四). 경북 안동에서 출생. 부친은 퇴계 이황의 13대손(이가호)이며 모친은 의병장 허형의 딸(허길). 유년기에 조부祖父에게서 소학을 배우고 도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6세 무렵 대구로 이사.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고등예비학교에서 1년간 재학. 1925년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항일단체에 입단. 1926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귀국. 그해 장진홍 의거(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 1930년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 기자활동을 하면서 은밀히 항일활동을 펼치다가 1932년 다시 중국행. 항일활동 인사들과 접촉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 귀국 후 다시 구속되었다가 석방, 문필활동을 펼치던 중 1943년 피검, 북경으로 압송되어 1944년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첫작품은「황혼」(『신조선』,1933).「절정」, 「광야」, 「청포도」, 「꽃」, 「황혼」 등의 대표시를 남겼으며, 1946년 비평가인 아우 이원조의 편집으로 유고 시집 『육사시집』 출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