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 함주시초(咸州詩抄)
□ 북관(北關)
명태(明太)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 칼질한 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숙히 여진(女眞)의 살 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 본다
□ 노루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 데다 이 거리에 산골 사람이 노루 새끼를 데리고 왔다
산골 사람은 막베 둥거리 막베 잠방둥에를 입고 노루 새끼를 닮았다
노루 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 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 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 사람을 닮았다
산골 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 고사(古寺)
부뚜막이 두 길이다 이 부뚜막에 놓인 사닥다리로 자박수염 난 공양주는 성궁미를 지고 오른다
한 말 밥을 한다는 크나큰 솥이 외면하고 가부틀고 앉아서 염주도 세일 만하다
화라지송침이 단 채로 들어간다는 아궁지 이 험상궂은 아궁지도 조앙님은 무서운가 보다
농마루며 바람벽은 모두들 그느슥히 흰밥과 두부와 튀각과 자반을 생각나 하고
하폄도 남즉하니 불기와 유종들이 묵묵히 팔짱 끼고 쭈그리고 앉았다
재 안드는 밤은 불도 없이 캄캄한 까막나라에서 조앙님은 무서운 이야기나 하면 모두들 죽은 듯이 엎대었다 잠이 들 것이다
□ 선우사(膳友辭)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 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산곡(山谷)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주까리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짜기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울을 나려고 집을 한 채 구하였다 집이 몇 집 되지 않는 골 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 낟가리가 쌓여서 어느 세월에 비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았다 나는 자꾸 골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 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내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지난 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 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 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조광, 1937. 10
백석 시인 / 흰 밤
옛 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사슴, (자가본),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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