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시인 /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적막강산>(1963)-
이형기 시인 / 폭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적막강산>(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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