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가을 바람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데, 무어라고 네 마음은 종이 풍지처럼 떨고 있니? 나는 서글프구나! 해맑은 유리창아! 그렇게 단단하고 차디찬 네 몸, 어느 구석에 우리 누나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 있니?
참말로 누가 오라고나 했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달아와서, 그리 마다는 나무 잎새를 훑어 놓고, 내 아끼는 유리창을 울리며 인사를 하게.
너는 그렇게 정말 매몰하냐? 그렇지만 나는, 영리한 바람아, 네가 정답다. 재작년, 그리고 더 그 전해에도, 가을이 올 적마다, 곁눈 하나 안 떠 보고, 내가 청년의 길에 충성되었을 때, 내 머리칼을 날리던 너는, 우렁찬 전진의 음악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누구가 퇴각이란 것을 꿈에나 생각했던가? 눈보라가 하늘에 닿은 거칠은 벌판도 승리에의 꽃밭이었다.
오늘…… 오래된 집은 허물어져 옛 동간들은 찬 마루판 위에 얽매여 있고, 비열한들은 이상과 진리를 죽그릇과 바꾸어, 가을비가 낙엽 위에 찬데, 부지런한 너는 다시 그때와 같이 내게로 왔구나!
정답고 영리한 바람아! 너는 내 마음이 속삭이는 말귀를 들을 줄 아니, 왜 말이 없느냐? 필연코 길가에서 비열한들의 군색한 푸념을 듣고 온 게로구나! 입이 없는 유리창이라도 두드리니깐 울지 않니? 마음 없는 낙엽조차 떨어지면서, 제 슬픔을 속이지는 않는다.
짓밟히고 걷어채이면서도, 웃으며 아첨할 것을 잊지 않는 비열한들을, 보아라! 영리한 바람아, 저 참말로 미운 인간들이, 땅에 내던지는 한 그릇 죽을 주린 개처럼 쫓지 않니?
불어라, 바람아! 모질고 싸늘한 서릿바람아, 무엇을 거리끼고 생각할까? 너는 내 가슴에 괴어 있는 슬픈 생각에도 대답지 말아라. 곧장 이 평양성(平壤城)의 자욱한 집들의 용마루를 넘어, 숲들이 흐득이고 강물이 추위에 우[鳴]는 겨울 벌판으로……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았으니까……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강(江)가로 가자
얼음이 다 녹고 진달래 잎이 푸르러도, 강물은 그 모양은커녕 숨소리도 안 들려준다.
제법 어른답게 왜버들가지가 장마철을 가리키는데, 빗발은 오락가락 실없게만 구니 언제 대하(大河)를 만나 볼까?
그러나 어느덧 창밖에 용구새가 골창이 난 지 10여일, 함석 홈통이 병사(病舍) 앞 좁은 마당에 딩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침대를 일어나 발돋움을 하고 들창을 열었다. 답답어라, 고성 같은 백씨기념관(白氏紀念館)만이 비어져서 묵묵하다.
오늘도 파도를 이루고 거품을 내뿜으며 대동강은 흐르겠지? 일찍이 고무의 아이들이 낡은 것을 향하여 내닫던 그 때와 같이
흐르는 강물이여! 나는 너를 부(富)보다 사랑한다. `우리들의 슬픔'을 싣고 대해로 달음질하는 네 위대한 범람을! 얼마나 나는 너를 보고 싶었고 그리웠는가? 그러나 오늘도 너는 모르는 척 저 뒤에 숨어 있다, 누운 나를 비웃으며.
정말 나는 다시 이곳에서 일지를 못할 것인가? 무거운 생각과 깊은 병의 아픔이 너무나 무겁다.
오오, 만일 내가 눈을 비비고 저 문을 박차지 않으면, 정말 강물은 책 속에 진리와 같이 영원히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인연 없이 흐를지도 모르리라.
누구나 역사의 거센 물가로 다가서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의 방랑자로 죽어 버릴지 누가 알 것일까? 청년의 누가 과연 이것을 참겠는가? 두 말 말고 강가로 가자,
넓고 자유로운 바다로 소리쳐 흘러가는 저 강가로!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고향(故鄕)을 지나며
당신의 마을은 이미 잠들었습니까? 등불 하나이 없이 캄캄하니 답답습니다.
여기 그대 아들이 있습니다.
부산을 떠난 막차가 환하니 달리지 않습니까? 개 소리 한 마디 들림직하건만 하늘과 땅이 소리도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누런 수캐란 놈도 혹여 양식이 되지나 않았습니까?
인젠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림도 속절없다. 주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집도 다하고, 기름도 마르고, 기운도 지쳐,
아아, 마음 아픕니다. 죽은 듯 마당에 쓰러지지나 않았습니까?
기적이 우니 차가 굴 속에 드나봅니다. 안타깝습니다, 이제 고향은 눈 앞에 스러지렵니다.
어머님 묻힌 건너 산 위 별들이 눈물이 어렸습니다. 인제 내 하나가 있고, 벼락 맞은 수양이 섰고, 그대가 늘 소를 매어 여름이면 파리가 왕왕 끓었습니다.
아들이 마을 전설과 옛노래를 익힌 곳도 게 아닙니까?
오늘 새벽 비가 내리면, 그대는 또 괭이를 잡고, 논 가운데 섭니까? 당신의 굽은 등골의 아픔이 아들의 온몸에 사무칩니다.
아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대 슬픔은 너무나 큽니다. 그대 정숙한 안해도 이 속에 죽었고, 당신의 청승궂은 자장가로 자란 누이도 이 속에 죽고,
그만 떨치고 일어나, 당신을 받들 먼 날을 그리어 내지로 간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오는 아들의 손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흙방 위에 꼬부리고 누운 그대를 헛되이 눈감아 생각할 뿐.
한되는 일입니다. 그대 이름 부를 자유도 없습니다.
곧장 내일 아침 지정받은 어느 곳에 닿아야 합니다.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준엄한 길입니다.
그대여! 당신은 아들의 길을 축복합니까?
그대 무릎 아래 다시 엎드려 볼 기약도 막막한, 슬픈 길이 북쪽으로 뻔하니 뚫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압니까, 아들의 길이 눈물보다도 영광이 어린 것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호올로 흐르는 그대의 눈물이 아들의 타는 마음 속에 기름을 붓는 비밀을.
아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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