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 / 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시집>(1934)-
정지용 시인 / 그의 반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시문학 3호>(1931. 10)-
정지용 시인 / 장수산 1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
-<문장 2호>(1939)-
정지용 시인 / 춘설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어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문장3호>(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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