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 / 낙화
1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상아탑>(1946)-
조지훈 시인 / 다부원(多富院)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 공방의 화포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역사 앞에서>(1959)-
조지훈 시인 / 민들레꽃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풀잎단장>(1952)-
조지훈 시인 / 석문(石門)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조지훈 전집>(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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