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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백석 시인 / 조당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0.

백석 시인 / 조당에서

 

 

나는 지나(支那)나라 사람들과 같이 목욕을 한다

무슨 은(殷)이며 상(商)이며 월(越)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후손들과 같이

한 물통 안에 들어 목욕을 한다

서로 나라가 다른 사람인데

다들 쪽 발가벗고 같이 물에 몸을 녹이고 있는 것은

대대로 조상도 서로 모르고 말도 제가끔 틀리고 먹고 입는 것도 모두 다른데

이렇게 발가들 벗고 한 물에 몸을 씻는 것은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다

이 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마들이 번번하니 넓고 눈은 컴컴하니 흐리고

그리고 길쭉한 다리에 모두 민숭민숭하니 다리털이 없는 것이

이것이 나는 왜 자꾸 슬퍼지는 것일까

그런데 저기 나무판장에 반쯤 나가 누워서

나주볕을 한없이 바라보며 혼자 무엇을 즐기는 듯한 목이 긴 사람은

도연명(陶淵明)은 저러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또 여기 더운물에 뛰어들며

무슨 물새처럼 악악 소리를 지르는 삐삐 파리한 사람은

양자(楊子)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이와 같았을 것만 같다

나는 시방 옛날 진(晋)이라는 나라나 위(衛)라는 나라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이리하여 어쩐지 내 마음은 갑자기 반가워지나

그러나 나는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진다

그런데 참으로 그 은(殷)이며 상(商)이며 월(越)이며 위(衛)며 진(晋)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이 후손들은

얼마나 마음이 한가하고 게으른가

더운물에 몸을 불키거나 때를 밀거나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제 배꼽을 들여다보거나 남의 낯을 쳐다보거나 하는 것인데

이러면서 그 무슨 제비의 춤이라는 연소탕(燕巢湯)이 맛도 있는 것과

또 어느 바루 새악시가 곱기도 한 것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일 것인데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그러나 나라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글쎄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쪽 발가벗고 있는 것은

어쩐지 조금 우스웁기도 하다

 

인문평론, 1941. 4

 

 


 

 

백석 시인 / 창원도(昌原道)

 

 

 

 

솔포기에 숨었다

토끼나 꿩을 놀래 주고 싶은 산(山)허리의 길은

 

엎대서 따스하니 손 녹이고 싶은 길이다

 

개 데리고 호이호이 휘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은 길이다

 

괴나리봇짐 벗고 땃불 놓고 앉아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길이다

 

승냥이 줄레줄레 달고 가며

덕신덕신 이야기하고 싶은 길이다

 

더꺼머리총각은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길이다

 

조선일보, 1936. 3. 5

 

 


 

 

백석 시인 / 촌에서 온 아이

 

 

촌에서 온 아이여

촌에서 어젯밤에 승합자동차를 타고 온 아이여

이렇게 추운데 웃동에 무슨 두룽이 같은 것을 하나 걸치고 아랫도리는 쪽 발가벗은 아이여

뽈다구에는 징기징기 앙광이를 그리고 머리칼이 노란 아이여

힘을 쓸려고 벌써부터 두 다리가 푸둥푸둥하니 살이 찐 아이여

너는 오늘 아침 무엇에 놀라서 우는구나

분명코 무슨 거짓되고 쓸데없는 것에 놀라서

그것이 네 맑고 참된 마음에 분해서 우는구나

이 집에 있는 다른 많은 아이들이

모두들 욕심 사납게 지게굳게 일부러 청을 돋혀서

어린아이들치고는 너무나 큰소리로 너무나 튀겁 많은 소리로 울어 대는데

너만은 타고난 그 외마디 소리로 스스로웁게 삼가면서 우는구나

네 소리는 조금 썩심하니 쉬인 듯도 하다

네 소리에 내 마음은 반끗이 밝아오고 또 호끈히 더워 오고 그리고 즐거워 온다

나는 너를 껴안아 올려서 네 머리를 쓰다듬고 힘껏 네 작은 손을 쥐고 흔들고 싶다

네 소리에 나는 촌 농삿집의 저녁을 짓는 때

나주볕이 가득 드리운 밝은 방안에 혼자 앉아서

실감기며 버선짝을 가지고 쓰렁쓰렁 노는 아이를 생각한다

또 여름날 낮 기운 때 어른들이 모두 벌에 나가고 텅 비인 집 토방에서

햇강아지의 쌀랑대는 성화를 받아 가며 닭의 똥을 주워 먹는 아이를 생각한다

촌에서 와서 오늘 아침 무엇이 분해서 우는 아이여

너는 분명히 하늘이 사랑하는 시인이나 농사꾼이 될 것이로다

 

문장, 1941

 

 


 

백석(白石) 시인 (1912.7.1~1995)

본명 백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