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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형원 시인 / 꿈에 본 사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6.

김형원 시인 / 꿈에 본 사람

 

 

꿈에 본 사람-

그러나 내가

눈을 뜨고 다리를 놀리어

都會로 거러가면서

 

그의 머리는 줌억만하고

그의 몸은 사람의

三倍나 되게 크다

그리고 그는 華麗한

비단:옷을 입엇다

 

꿈에 본 사람!

그러나 내가

눈을 뜨고 다리를 놀리어

山村으로 거러가면서

 

그의 머리는 큰 박만 하고

그의 몸은 참혹하게

뼈만 앙상하다

그리고 그는 떨어진

베:옷을 입엇다

* * * *

아! 어찌한 對照!

아! 어찌한 幻覺!

 

- 開闢, 1921년 6월

 

 


 

 

김형원 시인 / 그리운 강남

 

 

1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후렴)

 

2

삼월도 초하루 당해 오면은

가뜩이나 들썩한 이 내 가슴에

제비 떼 날러와 지저귄다네

 

3

강남이 어딘지 누가 알리오

맘 홀로 그려진 열도 두 해에

가 본적 없으니 제비만 안다네

 

4

집집에 옹달샘 저절로 솟고

가시 보시 맞잡아 즐겨 살으니

천년이 하루라 평화하다네

 

5

저마다 일하여 제 살이하고

이웃과 이웃이 서로 믿으니

빼앗고 다툼이 애적에 없다네

 

6

하늘이 풀리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부르니

이 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7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 감은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 발목 상한지 오램이라네

 

8

그리운 저 강남 언제나 갈가

구월도 구일은 해마다 와도

제비 떼 갈 제는 혼자만 간다네

 

9

그리운 저 강남 건너가려면

제비 떼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면 가면 간다네

 

 


 

 

김형원 시인 / 그대가 물으면

 

 

그대가 물으면,

그대가 나의 마음을 물으면,

천 겹의 뒤웅박 속에 들어서

어리석은 농(農)부(夫)의 손으로 시렁에 얹힌

담배씨 한 알이라고 대답하리라.  

 

그대가 물으면,

그대가 나의 마음을 물으면,

씨 뿌리는 봄철은 지나가랴 하되

잊음성 많은 농(農)부(夫)의 버릇이

뒤웅박을 그대로 시렁에 얹어 두어서

싹 나랴다가 시드는 씨앗이라고 하리라.

 

그대가 물으면,

그대가 나의 마음을 물으면,

그러나 아직도 삶의 힘은 남아 있다

대(大)지(地)의 품에 들기만 하면

말랐던 삶의 씨도 살아나리라고

나는 대답하리라, 쾌(快)히 대답하리라.

 

 


 

 

김형원 시인 / 감사

 

 

더러운 때가 더덕더덕 붙은 발을

함부로 담궈도 흔연한 얼굴로

즐겁게 노래만 하며 흘러가는

깊은 골 바위 사이 시냇물이여

침을 뱉고 돌멩이를 던져도

한결같이 생글거리는 시냇물이여

매달려도, 괴롭다 아니 하는

가냘픈 나무 가지여

흘겨보아도 피할 줄 모르는

숲 사이의 흰구름이여

 

아, 나는 그대들에게 감사들인다

 


 

김형원(金炯元) 시인 / 1901~?

호: 석송(石松). 1900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 1920 문단에 데뷔하여 <개벽>에 미국의 민중 시인 휘트먼을 소개. 1919년 『매일신보』에 기자로 입사. 1920년 8월 『동아일보』로 이직하여 사회부장, 같은 해 시 「이향(離鄕)」을 발표. 「아 지금은 새벽 네시」(『개벽』 1924년 11월호)를 발표한 이후, 『개벽(開闢)』과 『별건곤(別乾坤)』 등에 다수의 시를 발표.

1923년 도쿄특파원으로 근무., 반항적인 성격의 시 「분순의 피」 발표. 1924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개혁운동이 실패하자 『조선일보(朝鮮日報)』로 이직하여 사회부장·지방부장 등을 거쳤지만, 1925년 '조선일보 필화사건'으로 1926년 3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사회부장·편집부장,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일보』 편집국차장·국장 등을로 근무. 1938년 4월부터 1940년까지 『매일신보(每日新報)』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1939년 7월 매일신보사에서 중일전쟁 2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성전(聖戰) 2주년 좌담회(6회)'에 매일신보사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했고, 그해 7월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평의원이 되었다. 1941년 9월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해방 이후 1945년 12월 복간된 『조선일보』을 비롯하여 『서울신문』·『대동신문(大東新聞)』 등에서 전무·부사장으로 재직했다. 1946년 이범석(李範奭)의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의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1948년 부터 공보처 차장으로 재직하던 중 '서울신문 반정부이적행위 사건'과 관련, 1949년 퇴임했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고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