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하늘
감이 붉은 시골 가을이 아득히 푸른 하늘에 놀 같은 미결사의 가을 해가 밤보다도 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 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가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거리는 바다
나의 생각고 궁리하던 이것저것을, 다 너의 물결 위에 실어, 구름이 흐르는 곳으로 띄워 볼까!
동해 바닷가에 작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해상(海上)에서
가라앉듯 멀리 대마도 남단은 수평선 위에 스러졌다.
동그란 해가 어느새 붉게 풀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곳, 드문드문 검은 점들은 유구 열도(流球列島)인가?
물새들도 어느새 검은 옷을 입어, 눈선 나그네를 희롱틋 노니는구나!
아아! 불빛이 보인다. 어렴풋 관문해협(關門海峽)의 저녁 불들이 그 가운데는 붉고 푸른 불들도 있다.
연락선은 곤두설 듯 속력을 돋운다만, 인제 고향은 아득히 멀어졌고, 나는 저곳 산천의 이름도 못 들었다.
―정녕 이곳에 고향으로 가지고 갈 보배가 있는가? ―나는 학생으로부터 무엇이 되어 돌아갈 것인가?
가슴을 짚어 보아라, 하얗고 가는 손아,
누구가 이러한 저녁 청년들의 가슴 위에 얹힌 떨리는 손에 흐르는 더운 맥박을 짐작하겠는가.
태평양, 태평양 넓은 바다여!
일본 열도 저 위 지금 큰 별 하나이 번적였다. 내일 하늘엔 어떤 바람이 불 것인가?
배는 아직 바다 위에 떠 있고, 인제 겨우 동해도(東海道) 연선(沿線)의 긴 열차는 들어온 듯하나,
아아! 나는 두 손을 벌리어 하늘을 안고, 목적한 땅 위에 서 물결치는 태평양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향수
고향은 이제 먼 반도에 뿌리치듯 버리고 나와,
기억마저 희미하고, 옛일은 생각할수록 쓰라리다만,
아아! 지금은 오월 한창때다.
종달새들이 팔매친 돌처럼 곧장 달아 올라가고, 이슬 방울들이 조으는, 초록빛 밀밭 위, 어루만지듯 미풍이 불면, 햇발들은 화분(花粉)처럼 흩어져.
두 손은 벌려, 호랑나비를 쫓던 또랑가의 꿈이, 아직도 어항 속에 붕어처럼 맑다만.
지금은 오월 한창 때
소낙비가 지나간 도회의 포도 위 한 줌 물 속에, 아아! 나는 오월의 푸른 하늘을 보며, 허위대듯 잊기 어려운 나비를 쫓고 있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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