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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임화 시인 / 초혼(招魂)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5.

임화 시인 / 초혼(招魂)

 

 

1946년 1월 19일 새벽에 서울 삼청동(三淸洞) 조선학병동맹회관(朝鮮學兵同盟會館) 전투(戰鬪)에서 사몰(死沒)한 세 용사(勇士)의 영령(英靈) 앞에 드리노라.

 

돌아오라

 

     박 진 동(朴晋東)

     김 성 익(金星翼)

     이    달(李  達)

 

외로운 너희의 영혼(靈魂)은 어느 하늘 가에 있나뇨

밤 하늘 차운 길에 간단 말도 없이 호을로 나서

너희는 동무도 없이 어디로 어디로 걸어 가나뇨

 

어느 동족(同族)이 있어 너희를 죽이되 전사(戰士)로서 하지 아니하고

도적의 떼와 같이 어두운 밤 소리도 없이 하였나뇨

 

원수의 쫓임에 어린 사슴처럼 주검의 땅에 이르러서도

조국(祖國)의 하늘을 우러러보던 눈은 다시 어디메서 조국(祖國)을 바라보나뇨

 

너희의 영혼(靈魂)은 아직도 조국(祖國)의 하늘에 있느냐

돌아오라 가던 길 멈추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라.

 

찬가, 백양당, 1947

 

 


 

 

임화 시인 / 최후(最後)의 염원(念願)

 

 

얼마나 크고,

얼마나 두려운 힘이기에,

세월이여! 너는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왔느냐?

 

밀치고, 또

박차고 하면,

급기야 나는

최후의 항구로 외로이

돌아오지 않는 손이 되리라만,

낙일(落日)이여! 나에겐

아직 한 마디 말이 있다.

 

참말 머리 위엔

별 하나이 없고,

어둔 하늘이

홍수처럼

산하를 덮어,

한 자욱 발길조차

나의 고향을

밟을 수가 없다면,

 

아아, 꺼지려는 눈아!

네 빛이 흐리기 전에,

차라리 나는

호화로이 밤 하늘에 흩어지는

오색 불꽃에,

아름다운 운명을

배우련다.

 

최후의 염원이여!

너는 나의

즐거움이냐? 슬픔이냐?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통곡(慟哭)

 

 

이미 타 버려

꺼진

가슴 속에

빛나는 것은

진주 알이냐

별 알이냐

대체 소리가

우러나오는 곳을

나는 알 수가 없다

 

형제(兄弟)여

화원(花園)에서

떠나 온 것은

어느때 쯤이냐

흩어진 장미(薔薇)를

줏을려는 너의 손길이

찾는 것은

지내간 꿈이냐

 

아……

하늘 가득히

흩어진 것은

절망(絶望)의

독(毒)한 화분(花粉)이다

땅을 치면

우러나오는 소린

한낱 비탄(悲嘆)의

높은 음향(音響)이다

 

혼령(魂靈)도 죽고

기적(奇蹟)도 죽고

승리(勝利)한

적(敵)의 눈앞에서

너의 가슴이

탄주(彈奏)하는

장송(葬送)의 곡(曲)을 따라

걸어가는 앞길에는

무덤 이상(以上)의 운명(運命)이 있다

 

형제(兄弟)여

나는 이런 때

그대들의 가슴이

한숨에 붓지 않음을

감사(感謝)한다

 

미인(美人)일지라도, 비록

절세(絶世)의 미인(美人)일지라도

한숨을 쉰다는것은

난 싫어한다

차라리

마음의 수문(水門)을

탁 열어 놓고

횡일(橫溢)하는 분류(奔流) 속에

운명(運命)을 바라보고 싶다

 

머리채를 풀어 제치고

자기의 운명(運命)을

애인(愛人)처럼 끌어안는

여인(女人)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아름다우냐

 

전율(戰慄)하는 운명(運命)의 등 뒤

도깨비처럼 우뚝 선 건

아…… 잊기 어려운 적(敵)

슬픈 소리가 부른 것은

바로 원수와의 해후(邂逅)가 아니었느냐

 

분노(憤怒)란 청년(靑年)의 명예(名譽)가 아니냐

보복(報復)이란 생명(生命)의 표적(標的)이 아니냐

 

무엇 때문에

통곡(慟哭)하는 마음이 있느냐

한숨에 어린 가슴 위에

흙더미가 내려앉을 때

통곡(慟哭)하는 마음은

그 위에 피는

한떨기 아네모네리라

 

어떤 놈이

통곡(慟哭)을

매장(埋葬)의 노래라

비웃느냐

나는 슬플 때마다

개고리처럼 아우성치며

울어 대는 반도인(半島人)의 자손(子孫)이다

나는 우러나오는

제 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큰 소리로

우는 시인(詩人)이다

 

찬가, 백양당, 1947

 

 


 

임화 시인 / (1908∼1953) 약력

본명 인식(仁植).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중학을 중퇴했으며, 1926년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습작품을 발표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화가의 시'로 등단. 1929년에 「네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 등의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대 중반 사회 정세가 악화되면서 낭만적 경향의 시를 썼으며,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7년 월북후 미제의 간첩이라

는 죄명으로 1953년 사형을 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1938)과 『찬가』(1947) 평론 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