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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형원 시인 / 불은 꺼졌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5.

김형원 시인 / 불은 꺼졌다

 

 

불은 꺼졌다!

조그마한 화로의

두어 조각 숯불은

마침내 꺼졌다!   

 

불은 꺼졌다!

한 도막 초의

흐릿한 불빛은

마침내 죽었다!   

 

불은 꺼졌다!

가냘픈 내 몸의

피를 끓이던 불은

마침내 식었다   

 

아! 남은 것은

하아얀 재와

까아만 심지와

싸아늘한 등신뿐

 

 


 

 

김형원 시인 / 묘지(墓地) 1

 

 

墓地! 墓地―

그곳은 생명을 일흔

사람들의 住宅이다

 

그곳엔

歡樂도 업고

悲痛도 업다

愛情도 嫉妬도……

아모 것도 업다

봄:바람 가을:비에

우는 새 웃는 꼿이

오즉 그 空虛의 主人일다

 

그러나

墓地! 墓地는

우리 집 門前이다

 

開闢, 1921년 5월

 

 


 

 

김형원 시인 / 묘지(墓地) 2

 

 

墓地― 그곳은

傳統의 아버지의

隱居한 村落이다

 

그네는

自己의 愛子― 傳統을

세상에 선물하고

가만히 墓地로 숨엇다

 

그네의 선물은

商品과 가티

世上이란 埠頭에

가득히 싸히었다

 

아! 人生아-

너의 이름은

「傳統의 連鎖」일다

恨업시 길은

 

- 開闢, 1921년 5월

 

 


 

 

김형원 시인 / 동지(冬至)

 

 

茶禮는 마치었다

우리는 팟죽 상을 바닷다

家族一同이……

입울 속에서부터

팟죽:노래를 부르던

일곱 살 먹은 어린

누의동생까지

 

그러나 未久에

어린 누의동생은

수저를 노코

우두커니 안젓다-

 

할머니가 보시고

「아가 왜 안 먹니?」

하고 부르시엇다

 

「한 그릇 다 먹으면

한 살 더 먹으니까……」

어린 동생은 이러케 부르지젓다

 

우리는 모다 크게 웃엇다

그리고 팟죽은

마츰내 不足했다

 

開闢, 1921년 5월

 

 


 

김형원(金炯元) 시인 / 1901~?

호: 석송(石松). 1900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 1920 문단에 데뷔하여 <개벽>에 미국의 민중 시인 휘트먼을 소개. 1919년 『매일신보』에 기자로 입사. 1920년 8월 『동아일보』로 이직하여 사회부장, 같은 해 시 「이향(離鄕)」을 발표. 「아 지금은 새벽 네시」(『개벽』 1924년 11월호)를 발표한 이후, 『개벽(開闢)』과 『별건곤(別乾坤)』 등에 다수의 시를 발표.

1923년 도쿄특파원으로 근무., 반항적인 성격의 시 「분순의 피」 발표. 1924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개혁운동이 실패하자 『조선일보(朝鮮日報)』로 이직하여 사회부장·지방부장 등을 거쳤지만, 1925년 '조선일보 필화사건'으로 1926년 3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사회부장·편집부장,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일보』 편집국차장·국장 등을로 근무. 1938년 4월부터 1940년까지 『매일신보(每日新報)』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1939년 7월 매일신보사에서 중일전쟁 2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성전(聖戰) 2주년 좌담회(6회)'에 매일신보사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했고, 그해 7월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평의원이 되었다. 1941년 9월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해방 이후 1945년 12월 복간된 『조선일보』을 비롯하여 『서울신문』·『대동신문(大東新聞)』 등에서 전무·부사장으로 재직했다. 1946년 이범석(李範奭)의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의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1948년 부터 공보처 차장으로 재직하던 중 '서울신문 반정부이적행위 사건'과 관련, 1949년 퇴임했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고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