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주유(侏儒)의 노래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제군은 나의 이런 탄식을 좋아한다.
어찌다 나의 노래가 울음이 될 양이면, 제군은 한층 더 나를 사랑한다.
오!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제군은 벌써 열광하고 있다.
물론 나는 잘 안다. 제군들이 비극을 사랑하는 높은 취미를…….
막 끝이 되면 주인공은 병아리처럼 쓰러지고, 제군은 고조된 비극미(悲劇美)에 취할 듯하다.
하물며 비극의 종말을 가져오는 일장(一場)의 희극, 제군, 요컨대 나의 말로를 보고 싶다는 게지!
경애(敬愛)하는 제군, 만일 시저가, 결코 제군이 아니라, 시저가, 성병(聖餠)의 맛을 경계했다면, 파탄은 좀 더 연기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 번, 아니, 얼마든지 말해 줄까? 제군, 실로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지구와 박테리아
기압이저하하였다고 돌아가는철필을 도수가틀린안경을쓴 관측소원(觀測所員)은 깃대에다 쾌청이란백색기(白色旗)를내걸었다
그러나 제눈을가진급사란놈은 이삼분(二三分)이지난뒤 비가쏟아지면바꾸어달 붉은기를찾느라고 비행기가되어날아다닌다 ▶ 아까―그사무원(事務員)이페쓰트로즉사하였다는소식은 버―ㄹ써 관측소(觀測所)를새어나가 ―거리[街里]로 ▶우주(宇宙)로뚫고 ―산야(山野)로 질주한다―확대된다 그러나 아직도급사란놈은기(旗)에다 목을걸고귓짝속에서난무한다 비 ● 바람 쏴― 그것은여지없이급사를사무실로갖다붙였다 페쓰트―그것은위대한것인줄급사는알았다 ▶ 저기압과페쓰트― 충실한자(者)사무원(事務員)은창백한관(棺)속에서도……를 반드시 생각뿐만아니라 반드시찾을것이다
그럼 그는기(旗)를달지않을수가없었다 대신그는백색기(白色旗)를관(棺)속에누운그의가슴에다놓아주었다 ―가는자(者)에게 한줄기안위(安慰)를주기위하여 * 하아!사십년(四十年)동안에최초로한실수는 저기압과`페쓰트'라고급사란놈은창밖에서웃었다 빡테리아 빡테리아 ―그힘은위대하다 ―그힘은위대하다 * 일분간(一分間)에한마리식(式)잡아삼키니 십육억분(十六億分)이면―시간환산(時間換算)은성가시다 =지구는한(寒)이다 =지구는한(寒)이다 `빡테리아'는지구를포옹하고홍소(哄笑)한다 크게― 크게― (그웃음은흑색사변형(黑色四邊形)에배수(培數)로증대한다)―
조선지광, 1927. 8
임화 시인 / 지도(地圖)
두 번 고치지 못할 운명은 이미 바다 저쪽에서 굳었겠다. 바라보이는 것은 한 가닥 길뿐, 나는 반도의 새 지도를 폈다.
나의 눈이 외국 사람처럼 서툴리 방황하는 지도 위에 몇 번 새 시대는 제 낙인을 찍었느냐? 꾸긴 지도를 밟았다 놓는 손발이 내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분명히 심장 속에 파고든다.
이 새 문화의 촘촘한 그물 밑에 나는 전선줄을 끊고 철로길에 누웠던 옛날 어른들의 슬픈 미신을 추억한다.
비록 늙은 어버이들의 아픈 신음이나, 벗들의 괴로운 숨소리는, 두려운 침묵 속에 잠잠하여, 희망이란 큰 수부(首府)에 닿는 길이 경부철로(京釜鐵路)처럼 곱다 안 할지라도, 아! 벗들아, 나의 눈은 그대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는, 남북 몇 곳 위에 불똥처럼 발가니 달고 있다.
산맥과 강과 평원과 구릉이여! 내일 나의 조그만 운명이 결정될 어느 한 곳을 집는 가는 손길이, 떨리며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이름도 없는 한 청년이 바야흐로 어떤 도시 위에 자기의 이름자를 붙여, 불멸한 기념을 삼으려는, 엄청난 생각을 품고 바다를 건너던, 어느 해 여름 밤을 너는 축복치 않으려느냐?
나는 대륙과 해양과 그리고 성신(星辰) 태양과, 나의 반도가 만들어진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우리들이 사는 세계의 도면이 만들어진 복잡하고 곤란한 내력을 안다.
그것은 무수한 인간의 존귀한 생명과, 크나 큰 역사의 구둣발이 지나간 너무나 뚜렷한 발자욱이 아니냐?
한 번도 뚜렷이 불려 보지 못한 채, 청년의 아름다운 이름이 땅 속에 묻힐지라도, 지금 우리가 일로부터 만들어질 새 지도의 젊은 화공의 한 사람이란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3등선실 밑에 홀로, 별들이 찬란한 천공보다 아름다운 새 지도를 멍석처럼 쫙 펼쳐 보는, 한 여름 밤아, 광명이 있거라.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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