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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임화 시인 /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3.

임화 시인 /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항구의 계집애야! 이국(異國)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독크'는 비에 젖었고

내 가슴은 떠나가는 서러움과 내어 쫓기는 분함에 불이 타는데

오오 사랑하는 항구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난간은 비에 젖어 있다

 

`그나마도 천기(天氣)가 좋은 날이었더라면?'……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소용 없는 너만의 불쌍한 말이다

너의 나라는 비가 와서 이 `독크'가 떠나가거나

불쌍한 네가 울고 울어서 좁다란 목이 미어지거나

이국(異國)의 반역 청년인 나를 머물러 두지 않으리라

불쌍한 항구의 계집애야―울지도 말아라

 

추방이란 표(標)를 등에다 지고 크나큰 이 부두를 나오는 너의 사나이도 모르지는 않는다

네가 지금 이 길로 돌아가면

용감한 사나이들의 웃음과 아지 못할 정열 속에서 그 날마다를 보내이던 조그만 그 집이

인제는 구둣발이 들어나간 흙자욱밖에는 아무것도 너를 맞을 것이 없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의 계집애야!―너 모르진 않으리라

지금은 `새장 속'에 자는 그 사람들이 다―너의 나라의 사랑 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귀여운 너의 마음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그 사람들은 너를 위하고 너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어째서 목숨을 맹서하였으며

어째서 눈 오는 밤을 몇 번이나 거리 [街里]에 새웠던가

 

거기에는 아무 까닭도 없었으며

우리는 아무 인연도 없었다

더구나 너는 이국(異國)의 계집애 나는 식민지의 사나이

그러나―오직 한 가지 이유는

너와 나―우리들은 한낱 근로하는 형제이었던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한 일을 위하여

두 개 다른 나라의 목숨이 한 가지 밥을 먹었던 것이며

너와 나는 사랑에 살아 왔던 것이다

 

오오 사랑하는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비는 바다 위에 나리며 물결은 바람에 이는데

나는 지금 이 땅에 남은 것을 다 두고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나라로 돌아가려고

태평양 바다 위에 떠서 있다

바다에는 긴 날개의 갈매기도 올은 볼 수가 없으며

내 가슴에 날던 `요꼬하마'의 너도 오늘로 없어진다

 

그러나 `요꼬하마'의 새야―

너는 쓸쓸하여서는 아니 된다 바람이 불지를 않느냐

하나뿐인 너의 종이 우산이 부서지면 어쩌느냐

이제는 너의 `게다' 소리도 빗소리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가 보아라 가 보아라

내야 쫓기어 나가지마는 그 젊은 용감한 녀석들은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쇠창살 밑에 앉아 있지를 않을 게며

네가 있는 공장엔 어머니 누나가 그리워 우는 북륙(北陸)의 유년공(幼年工)이 있지 않으냐

  너는 그 녀석들의 옷을 빨아야 하고

  너는 그 어린것들을 네 가슴에 안아 주어야 하지를 않겠느냐―

`가요'야! `가요'야! 너는 들어가야 한다

벌써 `싸이렌'은 세 번이나 울고

검정 옷은 내 손을 몇 번이나 잡아다녔다

이제는 가야 한다 너도 가야 하고 나도 가야 한다

 

이국(異國)의 계집애야!

눈물은 흘리지 말아라

거리[街里]를 흘러가는 `데모' 속에 내가 없고 그 녀석들이 빠졌다고―

섭섭해하지도 말아라

네가 공장을 나왔을 때 전주(電柱) 뒤에 기다리던 내가 없다고―

거기엔 또다시 젊은 노동자들의 물결로 네 마음을 굳세게 할 것이 있을 것이며

사랑의 주린 유년공(幼年工)들의 손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젊은 사람들의 입으로 하는 연설은

근로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불같이 쏟아질 것이다

 

들어가거라! 어서 들어가거라

비는 `독크'에 나리우고 바람은 `덱기'에 부딪친다

우산이 부서질라―

오늘―쫓겨나는 이국(異國)의 청년을 보내 주던 그 우산으로 내일은 내일은 나오는 그 녀석들을 맞으러

`게다' 소리 높게 경빈가도(京濱街道)를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오오 그러면 사랑하는 항구의 계집애야

너는 그냥 나를 떠나 보내는 서러움

사랑하는 사나이를 이별하는 작은 생각에 주저앉을 네가 아니다

네 사랑하는 나는 이 땅에서 쫓겨나지를 않는가

그 녀석들은 그것도 모르고 갇혀 있지를 않은가 이 생각으로 이 분한 사실로

비둘기같은 네 가슴에 발갛게 물들어라

그리하여 하얀 네 살이 뜨거서 못 견딜 때

그것을 그대로 그 얼굴에다 그 대가리에다 마음껏 메다쳐 버리어라

 

그러면 그때면 지금은 가는 나도 벌써 부산, 동경을 거쳐 동무와 같이 `요꼬하마'를 왔을 때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서러웁던 생각 분한 생각에

피곤한 네 귀여운 머리를

내 가슴에 파묻고 울어도 보아라 웃어도 보아라

항구의 나의 계집애야!

그만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비는 연한 네 등에 나리우고 바람은 네 우산에 불고 있다

 

조선지광, 1929. 9

 

 


 

 

임화 시인 / 일년(一年)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낙엽이 저 눈발이 덮인

시골 능금나무의 청춘과 장년을……

언제나 너는 가고 오지 않는 것.

 

오늘도 들창에는 흰 구름이 지나가고,

참새들이 꾀꼬리처럼 지저귄다.

모란꽃이 붉던 작년 오월,

지금은 기억마저 구금되었는가?

 

나의 일년이여, 짧고 긴 세월이여!

노도에도, 달콤한 봄바람에도,

한결같이 묵묵하던 네 표정을 나는 안다.

허나 그렇게도 일년은 정말 평화로왔는가?

 

`피녀(彼女)'는 단지 희망하는 마음까지

범죄 그 사나운 눈알로 흘겨본다.

나의 삶이여! 너는 한바탕의 꿈이려느냐?

한 간 방은 오늘도 납처럼 무겁다.

 

재바른 가을 바람은 멀지 않아,

버들잎을 한 웅큼 저 창 틈으로,

지난해처럼 훑어 넣고 달아나겠지,

마치 올해도 세계는 이렇다는 듯이.

 

그러나 한 개 여윈 수인은 아직 살았고,

또다시 우리 집 능금이 익어 가을이 되리라.

눈 속을 스미는 가는 샘이 대해에 나가 노도를 이룰 때,

일년이여, 너는 그들을 위하여 군호를 불러라.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잊어진 시절을.

일년 평온무사한 바위 아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넓고 큰 대양의 앞날을 향하여,

지금 적막한 여로를 지키는 너에게 나는 정성껏 인사한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1908∼1953) 약력

본명 인식(仁植).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중학을 중퇴했으며, 1926년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습작품을 발표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화가의 시'로 등단. 1929년에 「네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 등의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대 중반 사회 정세가 악화되면서 낭만적 경향의 시를 썼으며,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7년 월북후 미제의 간첩이라

는 죄명으로 1953년 사형을 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1938)과 『찬가』(1947) 평론 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