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항구의 계집애야! 이국(異國)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독크'는 비에 젖었고 내 가슴은 떠나가는 서러움과 내어 쫓기는 분함에 불이 타는데 오오 사랑하는 항구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난간은 비에 젖어 있다
`그나마도 천기(天氣)가 좋은 날이었더라면?'……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소용 없는 너만의 불쌍한 말이다 너의 나라는 비가 와서 이 `독크'가 떠나가거나 불쌍한 네가 울고 울어서 좁다란 목이 미어지거나 이국(異國)의 반역 청년인 나를 머물러 두지 않으리라 불쌍한 항구의 계집애야―울지도 말아라
추방이란 표(標)를 등에다 지고 크나큰 이 부두를 나오는 너의 사나이도 모르지는 않는다 네가 지금 이 길로 돌아가면 용감한 사나이들의 웃음과 아지 못할 정열 속에서 그 날마다를 보내이던 조그만 그 집이 인제는 구둣발이 들어나간 흙자욱밖에는 아무것도 너를 맞을 것이 없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의 계집애야!―너 모르진 않으리라 지금은 `새장 속'에 자는 그 사람들이 다―너의 나라의 사랑 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귀여운 너의 마음속에 살았던 것도 아니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여 그리고 그 사람들은 너를 위하고 너는 그 사람들을 위하여 어째서 목숨을 맹서하였으며 어째서 눈 오는 밤을 몇 번이나 거리 [街里]에 새웠던가
거기에는 아무 까닭도 없었으며 우리는 아무 인연도 없었다 더구나 너는 이국(異國)의 계집애 나는 식민지의 사나이 그러나―오직 한 가지 이유는 너와 나―우리들은 한낱 근로하는 형제이었던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한 일을 위하여 두 개 다른 나라의 목숨이 한 가지 밥을 먹었던 것이며 너와 나는 사랑에 살아 왔던 것이다
오오 사랑하는 `요꼬하마'의 계집애야 비는 바다 위에 나리며 물결은 바람에 이는데 나는 지금 이 땅에 남은 것을 다 두고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나라로 돌아가려고 태평양 바다 위에 떠서 있다 바다에는 긴 날개의 갈매기도 올은 볼 수가 없으며 내 가슴에 날던 `요꼬하마'의 너도 오늘로 없어진다
그러나 `요꼬하마'의 새야― 너는 쓸쓸하여서는 아니 된다 바람이 불지를 않느냐 하나뿐인 너의 종이 우산이 부서지면 어쩌느냐 이제는 너의 `게다' 소리도 빗소리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가 보아라 가 보아라 내야 쫓기어 나가지마는 그 젊은 용감한 녀석들은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쇠창살 밑에 앉아 있지를 않을 게며 네가 있는 공장엔 어머니 누나가 그리워 우는 북륙(北陸)의 유년공(幼年工)이 있지 않으냐 너는 그 녀석들의 옷을 빨아야 하고 너는 그 어린것들을 네 가슴에 안아 주어야 하지를 않겠느냐― `가요'야! `가요'야! 너는 들어가야 한다 벌써 `싸이렌'은 세 번이나 울고 검정 옷은 내 손을 몇 번이나 잡아다녔다 이제는 가야 한다 너도 가야 하고 나도 가야 한다
이국(異國)의 계집애야! 눈물은 흘리지 말아라 거리[街里]를 흘러가는 `데모' 속에 내가 없고 그 녀석들이 빠졌다고― 섭섭해하지도 말아라 네가 공장을 나왔을 때 전주(電柱) 뒤에 기다리던 내가 없다고― 거기엔 또다시 젊은 노동자들의 물결로 네 마음을 굳세게 할 것이 있을 것이며 사랑의 주린 유년공(幼年工)들의 손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젊은 사람들의 입으로 하는 연설은 근로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불같이 쏟아질 것이다
들어가거라! 어서 들어가거라 비는 `독크'에 나리우고 바람은 `덱기'에 부딪친다 우산이 부서질라― 오늘―쫓겨나는 이국(異國)의 청년을 보내 주던 그 우산으로 내일은 내일은 나오는 그 녀석들을 맞으러 `게다' 소리 높게 경빈가도(京濱街道)를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오오 그러면 사랑하는 항구의 계집애야 너는 그냥 나를 떠나 보내는 서러움 사랑하는 사나이를 이별하는 작은 생각에 주저앉을 네가 아니다 네 사랑하는 나는 이 땅에서 쫓겨나지를 않는가 그 녀석들은 그것도 모르고 갇혀 있지를 않은가 이 생각으로 이 분한 사실로 비둘기같은 네 가슴에 발갛게 물들어라 그리하여 하얀 네 살이 뜨거서 못 견딜 때 그것을 그대로 그 얼굴에다 그 대가리에다 마음껏 메다쳐 버리어라
그러면 그때면 지금은 가는 나도 벌써 부산, 동경을 거쳐 동무와 같이 `요꼬하마'를 왔을 때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서러웁던 생각 분한 생각에 피곤한 네 귀여운 머리를 내 가슴에 파묻고 울어도 보아라 웃어도 보아라 항구의 나의 계집애야! 그만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비는 연한 네 등에 나리우고 바람은 네 우산에 불고 있다
조선지광, 1929. 9
임화 시인 / 일년(一年)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낙엽이 저 눈발이 덮인 시골 능금나무의 청춘과 장년을…… 언제나 너는 가고 오지 않는 것.
오늘도 들창에는 흰 구름이 지나가고, 참새들이 꾀꼬리처럼 지저귄다. 모란꽃이 붉던 작년 오월, 지금은 기억마저 구금되었는가?
나의 일년이여, 짧고 긴 세월이여! 노도에도, 달콤한 봄바람에도, 한결같이 묵묵하던 네 표정을 나는 안다. 허나 그렇게도 일년은 정말 평화로왔는가?
`피녀(彼女)'는 단지 희망하는 마음까지 범죄 그 사나운 눈알로 흘겨본다. 나의 삶이여! 너는 한바탕의 꿈이려느냐? 한 간 방은 오늘도 납처럼 무겁다.
재바른 가을 바람은 멀지 않아, 버들잎을 한 웅큼 저 창 틈으로, 지난해처럼 훑어 넣고 달아나겠지, 마치 올해도 세계는 이렇다는 듯이.
그러나 한 개 여윈 수인은 아직 살았고, 또다시 우리 집 능금이 익어 가을이 되리라. 눈 속을 스미는 가는 샘이 대해에 나가 노도를 이룰 때, 일년이여, 너는 그들을 위하여 군호를 불러라.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잊어진 시절을. 일년 평온무사한 바위 아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넓고 큰 대양의 앞날을 향하여, 지금 적막한 여로를 지키는 너에게 나는 정성껏 인사한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윤숙 시인 / 나의 별 외 2편 (0) | 2019.08.04 |
---|---|
김형원 시인 / 영원한 이별 외 3편 (0) | 2019.08.04 |
모윤숙 시인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외 2편 (0) | 2019.08.03 |
김형원 시인 / 벌거숭이의 노래 외 3편 (0) | 2019.08.03 |
임화 시인 /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 이불을 덮고 외 1편 (0) | 2019.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