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원 시인 / 벌거숭이의 노래
1 나는 벌거숭이다. 옷 같은 것은 나에게 쓸데없다. 나는 벌거숭이다. 제도 인습은 고인(古人)의 옷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시비도 모르고 선악도 모르는,
2 나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나는 두루마리까지 갖추어 단정히 옷을 입은 제도와 인습에 추파를 보내어 악수하는 썩은 내가 몰씬몰씬 나는 구도덕에 코를 박은, 본능의 폭풍 앞에 힘없이 항복한 어린 풀이다.
3 나는 어린 풀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나에게는 오직 생장이 있을 뿐이다. 태양과 모든 성신(星辰)이 운명하기까지, 나에게는 생명의 감로(甘露)가 내릴 뿐이다.
온 누리의 모든 생명들로 더불어, 나는 영원히 생장(生長)의 축배를 올리련다.
그리하여 나는 노래하려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감투를 쓴 사람으로부터 똥통을 우주로 아는 구더기까지,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그대들에게 이러한 노래를 (모순되지 않은 나의 노래를) 서슴지 않고 보내는 것을 기뻐하라. 새로운 종족아! 나의 형제들아! 그대들은 떨어진 옷을 벗어 던지자.
김형원 시인 / 작은 돌의 노래
나는 돌이다 그러나 산에 있는 바위도 아니고 물에 있는 암초도 아니다 우리집은 모래강변이고 나의 이름은 작은 돌이라 한다
나는 돌이다 그러나 조각가의 대리석도 아니고 귀부인의 보석도 아니다 우리집은 모래강변이고 나의 이름은 작은 돌이라 한다
나의 몸은 작다 그러나 야무진 천질(天質)이 사나운 물결을 받아내고 차진 천성이 미친 바람에도 꼼짝 않노라
나는 벙어리다 온 천지가 뒤떠들고 제각금 고함칠 때에 없는 듯 모래강변에 외로운 벙어리다
나는 앉은뱅이다 흐르는 물이 쉬지를 않고 저어가는 배가 님 없음을 아니 볼 때가 없건만 자리 뜸도 못하는 앉은뱅이다
나는 무생물이다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으며 자랄 줄도 모르는 느낌도 없는 숨소리도 없는 무생물이다
그러나 나는 다윗의 손만 빌면 골리앗의 박을 맞추리라 아! 우리집은 모래강변이고 나의 이름은 작은 돌이라 한다
김형원 시인 / 옥중기
닭 울자 잠 깨이자 꿈조차 슬어지자 꿈에 온 님마저 말없이 가시도다 창밖에 등대 한 달아 님 가실 길 밝혀라
옥중에 벗 만나니 기막히게 반갑다만 말없이 슬쩍 보고 못 본 체 돌아설 제 아무리 대장부라도 가슴 절여
팔 년을 기른 머리 깎여지는 이 마당에 칠 년을 정든 님도 못 보다니 웬 말인가 어즈버 세상 만사가 모다 무상
다팔머리 바싹 깎여 무릎 우에 나려지며 바르르 손을 떨며 나는 가오 하직하네 이제야 이 몸도 정말 징역살이
이 저녁 칠석임은 마음만의 짐작이오 은하수 어디 멘지 방이 깊어 아니 뵈네 아마도 까막까치만 헛수곤가
지난 해 이 날에는 세 사람 불리더니 지금에 나 호올로 옥살이 웬일인가 모를 건 세상일이라 구태 안들 뭣하리
한 간 방 졸아들어 반간이 되였어라 반간이 또 졸아서 반반 간 된다 한들 이 한 몸 가두기에야 부족함이 있으랴
한 간에 갇히기나 반간에 갇히기나 이 한 몸 갇히기는 언제나 일반일세 그러나 이 마음 가둘 방은 몇 간
쇠줄에 묵긴 사람 지쳐서 쓰러졌네 의사는 버릇으로 약 쓰랴 하는도다 두어라 다시금 살면 무삼 소망
부채를 거둬가니 더위도 갔나부다 더운 때 더위는 가기를 바랐지만 치울 때 닥쳐오면은 더위 생각
이웃방 십칠호가 혼자서 탄식하네 때 조타 중추가절 청주도 익었겠네 게 두소 신 청주전들 맘 편하리
새 옷 입자 추석되니 집 생각 새로워라 집에도 내 옷 두고 못 입혀 맘 상하리 두었다 나가거들랑 입혀주소
추석의 조흔 달도 내 창엔 안 비치네 달이야 무삼 일로 낯가려 비치리오 사람이 마음씨 글러 달빛 가려
인왕산 새에 두고 님과 나 갈려 있네 산마루 저 구름은 님과 나 함께 보리 지척이 천리라 함은 이를 두고
천리도 차만 타면 하루에 가는 세상 지척에 님을 두고 못 봄은 무슨 까닭 아마도 님과 나 사이 구만리인가
옥살이 두 달만에 집 편지 한 장 보네 줄줄이 훌터 보고 자자이 새겨봐도 안심코 몸 성하라는 부탁일 뿐
님이 준 글만 봐도 이렇듯 반갑거니 정말로 님 대하면 그 때엔 어떠하리 통으로 이 몸이 녹아 눈물 될 듯
님 편지 품고 자니 마루방도 다스하이 두 달의 홀 잠자리 오늘에야 면한지고 꿈꾸어 님 만나 뵈면 더욱 다행
150 나간 후론 콩밥도 맛없어라 옥에서 만난 이도 정들면 이렇거든 하물며 우리 님이야 말해 무엇
날마다 자고 나면 붉은 옷 친구 와서 썩는 속 저리라고 흰 소금 주고 가네 밤사이 다 썩은 속을 저려 무삼
콩밥도 남은 것이 백여 알 덩이라네 이것만 다 치우면 이 몸도 풀린다네 그러나 이 마음 풀릴 날은 언제
비 끝에 바람 부니 썩은 속 나려 앉네 단풍잎 흩날리니 이 마음 흩어지네 언제나 다시 봄 만나 즐겨볼까
김형원 시인 / 오! 압서가는 者여!
오! 압서가는 者여! 너는 惡魔다!
너의 발이― 赤土 무든 두 발이 純白한― 聖潔한― 밟지 아니한― 白雪이 덥힌 大道 우에 하나 둘씩 노힐 적에 온 길바닥은 피투성이가 된다
오! 압서가는 者여! 너는 惡魔다!
그러나 이러케 咀呪하는 나도 너와 全等한― 行爲를 하는 者다!
開闢, 19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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