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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남궁벽 시인 / 말(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8. 2.

남궁벽 시인 / 말(馬)

 

 

말님

나는 당신이 웃는 것을 본 일이 없읍니다.

언제든지 숙명을 체관(체관)한 것 같은 얼굴로

간혹 웃는 일이 있으나

그것은 좀 처럼 하여서는 없는 일이외다.

대개는 침묵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온순하게 물건을 운반도 하고

사람을 태워 가지고 달아나기도 합니다.

 

말님, 당신의 운명은 다만 그것뿐입니까.

그러하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외다.

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악을 볼 때

항상 내세의 심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당신이 운명을 생각할 때

항상 당신도 사람이 될 때가 있고

사람도 당신이 될 때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 신생활>1922.8

 

 


 

 

남궁벽 시인 / 별의 아픔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어린 아이가 뒹굴을 때에

감응적으로 깜짝 놀라신 일이 없으십니까.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지상의 꽃을 비틀어 꺾을 때에

천상의 별이 아파한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 신생활>1922.8

 

 


 

 

남궁벽 시인 / 풀

 

 

풀, 여름 풀

요요끼(代代木)들의

이슬에 젖은 너를

지금 내가 맨발로 삽붓삽붓 밟는다.

여인의 입술에 입맞추는 마음으로.

참으로 너는 땅의 입술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이것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죽으면 흙이 되마.

그래서 네 뿌리 밑에 가서

너를 복돋아 주마꾸나.

 

그래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너나 내나 우리는

불사(不死)의 둘레를 돌아다니는 중생이다.

그 영원한 역정(歷程)에서 닥드려 만날 때에

마치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될 때에

지금 내가 너를 삽붓 밟고 있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삽붓 밟아 주려무나.

 

 


 

남궁벽(南宮壁) 시인 / 1895~1922

시인. 호는 초몽(草夢). 평북에서 조선 일보사의 사장이였던 남궁훈의 외아들로 출생. 서울의 한성 고보에 들어가 재학 중 변영로와 친하게 지냈으며, 우등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야구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졸업 후 중앙 학교의 외국어 교사로 초빙되었으나 학생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후 일본의 도쿄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오산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5세 때 <대한 자강회 월보>에 [애국설]을 발표하여 지도층의 각성을 촉구했고, 일본에 있을때 <폐허>지의 동인으로 참가하여 [자연] [풀] [생면의 비애]등 자연을 찬미한 낭만적 경향의 시들을 발표하였다. 인도주의적 시인이었던 그는 천재 시인으로 촉망을 받았으나 아깝게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대표작 [풀]은 우리나라의 현대시를 장식하는 초창기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