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시인 / 가을의 동화(童話)
호수는 커다란 비취, 물 담은 하늘
산산한 바람은 호젓한 나뭇잎에 머물다 구름다리를 건너 이 호수로 불어 온다. 아른거리는 물무늬.
나는 한 마리의 잠자리가 된다. 나래에 가을을 싣고 맴돌다. 호숫가에 앉으면 문득 고향.
소향은 가을의 동화를 가만가만 내게 들려 준다.
김용호 시인 / 5월이 오면
무언가 속을 흐르는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멈추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답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속에 언제나 너는 한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김용호 시인 / 주막(酒幕)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威儀)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김용호 시인 / 눈 오는 밤에
오누이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매 바깥은 연신 눈이 내리고, 오늘밤처럼 눈이 내리고,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매의 옛이야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김용호(金容浩) 시인 경남 마산 출생. 마산상고를 거쳐 1935년에 도일, 같은 해 노자영(盧子泳)이 발행하는 《신인문학(新人文學)》지에 시 〈첫여름 밤에 귀를 기울이다〉를 발표하고, 계속 《쓸쓸하던 그날》, 실향의 아픔을 담은 장시 《낙동강》을 1938년에 발표하였다. 김대봉(金大鳳)과 알게 되어 《맥()》의 동인이 되면서 시작(詩作) 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1941년에 첫시집 《향연(饗宴)》을 도쿄에서 간행, 1943년에는 시집 《부동항(不凍港)》이 일제에 압수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주로 대학에서 시문학을 강의하면서 시작에 전념, 서사시 《남해찬가(南海讚歌)》를 비롯하여 《푸른 별》 《날개》 등의 시집을 간행하였고, 《세계명작 감상독본》《한국 애정명시선(韓國愛情名詩選)》《시원산책(詩園散策)》 등 시문학 감상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시는 재치로 쓰는 것이 아니다. 시는 가슴으로 써야 한다”는 지론을 지녔던 그는 현실의식이 남달리 강해 현실과 밀착된 참여 계통의 시를 많이 썼으나, 후기에 들어오면서 관조와 회고의 경향으로 흐른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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