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암흑의 정신
대양과 같이 푸른 잎새를, 그 젊은 수호졸(守護卒) 만산(滿山)의 초화(草花)를, 돌바위 굳은 땅 속에 파묻은 바람은, 이제 고아인 벌거벗은 가지 위에 소리치고 있다. 청춘에 빛나던 저 여름 저녁 하늘의 금빛 별들도 유명(幽冥)의 하늘 저쪽에 흩어지고, 손톱같이 여윈 단 한 개의 초생달, 그것조차 지금은 `레테'의 물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동 서 남 북 네 곳에 어디를 둘러보아도, 두 활개를 쩍 벌려 대공(大空)을 휘저어 보아도, 목청을 돋워 소리 높이 외쳐 보아도,
오오, 오오, 암흑의 끝 없는 동혈(洞穴),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의 호읍(號泣), 뇌명(雷鳴)과 같은 폭풍, 거암(巨巖)을 뒤흔드는 노호(怒呼),
오오, 이제는 없는가? 암흑의 이외에! 오오, 드디어 폭풍이 우주의 지배자인가?
생명의 즐거움인 삼월의 꽃들이여, 청년의 정신인 무성한 풀숲이여, 진리의 의지인 아름드리 교목(喬木)이여, 그리고 거인인 삼림의 혼이여?
새싹 위에 나부끼던 보드러운 바람, 풍족한 샘[泉], 빛나는 태양, 그러고 불멸의 정신인 산악 창공은, 하늘에 떠도는 한 조각 시의(猜疑)의 구름과 사(死)의 암흑 멸망의 바람만을 남기고, 자취도 없이 터울도 없이 스러졌는가?
깊은 낙엽송의 밀림과 두터운 안개에 싸인 저 험한 계곡 아래, 지금 이 여윈 창백한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숨소리조차 죽은 미지근한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 어둠의 공포 절망의 탄식에 떨고 있다. ―아무 곳으로도 길이 열리지 않는 암흑한 계곡에서. 우수수! 딱! 꽝! 우르르! 암벽이 무너지는 소리, 천세(千歲)의 거수(巨樹)가 허리를 꺾고 넘어지는 소리, 사멸의 하늘에 야수가 전율하는 소리, 끝 없는 어둠 침묵한 암흑, 오오! 만유로부터 질서는 물러가는가?
이 무변(無邊)의 대공(大空)을 흐르는 운명의 강 두 짝 기슭 생(生)과 사(死), 전진과 퇴각, 패배와 승리, 화해할 수 없는 양 언덕에 너는 두 다리를 걸치고, 회의의 흐득이는 심장으로 말미암아 전신을 떨고 있지 않으냐
그러나 빈사의 새여! 낡은 심장이여! 떨리는 사지여! 안 보이는가 안 들리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가
불길은 바람의 멱살을 잡고 암흑인 하늘의 가슴을 한껏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교목(喬木)들은 어깨를 비비며 불길을 일으키고, 시들은 풀숲은 불길에 그 몸을 던지며, 나뭇가지는 하늘 높이 오색의 불꽃을 내뽑지 않는가 그리고 삼림은! 커다란 불길의 날개로 거인인 산악을 그 품에 덤썩 끼고, 믿음직한 근육인 토양과 철의 골격인 암석을 시뻘겋게 달구면서 백척(百尺)의 장검인 화주(火柱)를 두르며, 고원(高遠)한 정신의 뇌명(雷鳴)과 함께 암흑의 세계와 격투하고 있다. 진실로 영웅인 작열한 전산(全山)을 그 가운데 태우면서……
오오! 새여! 그대 창백한 새여! 노래를 잊은 피리여! 너는 `햄렛트'냐? `파우스트'냐? `오네긴'이냐? 그렇지 않으면 유리제(製)의 양심이냐?
오오 이 미친 무질서의 광란 가운데서 주검의 운명을 우리들의 얼굴에 메다 치는 암흑 가운데서 너는 보는가? 못 보는가? 이 불길이 가져오는 생명의 향기를 이 장렬한 격투가 전하는 봄의 아름다움을 만산의 초화(草花)와 우거진 녹음, 그러고 황금색 실과(實果)의 단 그 맛[味]을
이 암흑, 폭풍, 뇌명(雷鳴)의 거대한 고통이 밀집한 교목(喬木)의 대오와 그 한 개 한 개의 영웅인 청년, 수목의 육체 가운데 굵고 검은 한 테의 연륜을 더 둘러 주고 가는 것을!
너는 두려워하느냐? 사는 것을…… 너는 아파하느냐? 청년인 우리들이 생존하고 성장하는 도표(道標)인 `나이'가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영리한 새여―아직도 양심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조그만 심장이여! 불룩 내민 그 귀여운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소리쳐라! `오라! 어둠이여! 울어라! 폭풍이여! 노호하라! 사(死)와 암흑의 마르세이유여!'
그렇지 않은가! 누구가 대지로부터 스며오르는 생명인 봄의 수액을 누구가 청년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영웅의 정신을 죽음으로써 막겠는가 암흑인가? 폭풍인가? 뇌명(雷鳴)인가?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야행차(夜行車) 속
사투리는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밥을 날라 가는 어색한 모양은, 그 까만 얼굴과 더불어 몹시 낯익다.
너는 내 방법으로 내어버린 벤또를 먹는구나.
`숟갈이나 걷어 가주올 게지……' 혀를 차는 네 늙은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일어선 채 부채질을 한다.
글쎄 옆에 앉은 점잖은 사람이 수건으로 코를 막는구나.
아직 멀었는가 추풍령은…… 그믐밤이라 정거장 푯말도 안 보인다. 답답워라 산인지 들인지 대체 지금 어디를 지나는지?
나으리들뿐이라, 누구한테 엄두를 내어 물을 수도 없구나.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양복장이는 모를 말을 지저귄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아나 보다.
되놈의 땅으로 농사 가는 줄을 누가 모르나. 면소(面所)에서 준 표지(紙)를 보지, 하도 지척도 안 뵈니까 그렇지!
차가 덜컹 소리를 치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필연코 어제 아이들이 돌멩이를 놓고 달아난 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너 그 사이다병은 집어 넣어 무얼 할래. 오호 착해라, 그래도 누이 시집갈 제 기름병을 할라고…….
노하지 마라 너의 아버지는 소 같구나. 빠가! 잠결에 기대인 늙은이의 머리를 밀쳐도, 엄마도 아빠도 말이 없고 허리만 굽히니…… 오오, 물소리가 들린다 넓고 긴 낙동강에……
대체 어디를 가야 이 밤이 샐까? 얘들아, 서 있는 네 다리가 얼마나 아프겠니? 차는 한창 강가를 달리는지, 물소리가 몹시 정다웁다. 필연코 고향의 강물은 이 꼴을 보고 노했을 게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양말 속의 편지
눈보라는 하루 종일 북쪽 철창을 때리고 갔다 우리들이 그날―회사 뒷문에서 `피케'를 모든 그 밤같이……
몇 번, 몇 번 그것은 왔다 팔 다리 콧구멍 손가락에―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프고 쓰린 것보다도 그 뒤의 일이 알고 싶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늙은 어머니들 굶은 아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모두들 다―사나이 자식들이다 언제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니 너만이 늙은 어메나 아베를 가진 게 아니고 나만이 사랑하는 계집을 가진 게 아니라고
어메 아베가 다 무에냐 계집 자식이 다 무에냐 세상의 사나이 자식이 어떻게 ××이 보기 좋게 패배하는 것을 눈깔로 보느냐 올해같이 몹시 오는 눈도 없었고 올해같이 추운 겨울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들은―계집애 어린애까지가 다―기계틀을 내던지고 일어나지 않았니
동해 바다를 거쳐오는 모질은 바람 회사의 뽐푸, 징박은 구둣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속에서도 우리는 이십일이나 꿋꿋이 뻗대 오지를 않았니
해고가 다 무에냐 끌려가는 게 다 무에냐 그냥 그대로 황소같이 뻗대이고 나가자 보아라! 이 추운 날 이 바람 부는 날―비누궤짝 짚신짝을 싣고 우리들의 이것을 이기기 위하여 구루마를 끌고 나아가는 저―어린 행상대(行商隊)의 소년을…… 그러고 기숙사란 문 잠근 방에서 밥도 안 먹고 이불도 못 덮고 이것을 이것을 이기려고 울고 부르짖는 저―귀여운 너희들의 계집애들을…… 감방은 차다 바람과 함께 눈이 들이친다 그러나 감방이 찬 것이 지금 새삼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선수들은 몇 번째나 몇 번째나 이 추운 이 어두운 속에서 다―그들의 쇠의 뜻을 달구었다
참자! 눈보라야 마음대로 미쳐라 나는 나대로 뻗대리라 기쁘다 ××도 ×××군도 아직 다 무사하다고? 그렇다 깊이 깊이 다―땅속에 들어들 박혀라
으―ㅇ 아무런 때 아무런 놈의 것이 와도 뻗대자― 나도 이냥 이대로 돌멩이 부처같이 뻗대리라
조선지광, 193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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