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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경린 시인 / 화장한 연대(年代)를 위하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1.

김경린 시인 / 화장한 연대(年代)를 위하여

 

 

오늘도

전쟁으로 인하여

피로한 나의 이미지에

가을비가 내리고

 

경사진 가로(街路)와

그렇게도 못잊었던 애정에

균열(龜裂)이 생길까 하여

 

때로는

부질없는 안일의 지대를

찾아보기도 하였다

 

선전삐라처럼

질주하는 윤전기와

군용열차의 폭음이

음악이 될 수 없는 지표에서

내일을

약속하라는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는 숙명은

차라리

화려한 속도와 화장법을

배우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연대(年代)와

그리고

변함없는 하늘과 별들은

 

나에게

새로운 형이학(形而學)을

요구하였음은 무리가 아니지만

 

바람과

온도가 그리는 포물선은

낡은 서명을 의미하기에

분바른 정치가와도 같이

함부로

비상할 수 없는 오늘이었다.

 

 


 

 

김경린 시인 / 지나치게 푸르러서

 

 

지나치게

푸르러서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잊었던 기억들이

재생되어 오는 것처럼

황사 현상이 당신 얼굴마저 흐리게 하는 날에도

길가에 길게 늘어선 가로수의 잎사귀와

마천루처럼 높은 담벼락 사이로

팔을 길게 내미는 라일락의 끝마디에서도

푸름이 크레파스처럼 흘러내리는

아침

 

저기 앞이

하늘에 내려와 머물고

습기가 피부에 잦아드는 날이면

신경을 자극하는 전류들이

팔을 아프게 한다는 그 사람에게

푸름이 담긴 시집을 남긴 채

내려오는 언덕 길에도

푸름은 동반자처럼 따라오고

 

참으로 우연하게도

언젠가 사랑 때문에

푸름과 자주색을 무척 좋아한다던

그 여인을 그날 만나게 된 것은

그 무슨 인과 관계인지 모를 일이기도 한데

 

거리의 사람들은

오늘의 바람을 아킬레스건으로

비유도 하지만

 

지나치게

푸른 계절 때문에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김경린(金璟麟.1918.4.24∼2006)

시인ㆍ실업가.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생. 1942년 일본 와세다 대학 토목공학과 졸업. 1967년 한양대 토목공학과 졸업, 197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석사과정 수료. 1939년 조선일보에 <차창> <꽁초> <화안(畵眼)>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1940년 일본의 시잡지 [Vou]의 동인으로 시를 쓰기 시작,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 해방 후에 귀국, 1950년 [후반기] [신시론(新詩論)] 동인으로 모더니즘운동에 앞을 서면서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썼다.

 한국시인협회 사업부 간사, 서울시 수도과장, 건설부 국토보전국 도시과장, 경설공무원교육원장 및 영남국토건설국장, 수자원개발공사 이사, 자유문학자협회 중앙위원, 한국신시학회 회장 역임. 세기종합기술공사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동 명예회장. 8ㆍ15 후에는 주로 토목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후반기 동인들과 함께 시집을 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제5회 문학상(1986), 1988년 제3회 상화시인상(1988), 녹조근정훈장, 대통령표창, 예술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가상(1994)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