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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임화 시인 / 새 옷을 갈아 입으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30.

임화 시인 / 새 옷을 갈아 입으며

 

 

젊은 아내의

부드런 손길이 쥐어짠

신선한 냇물이 향그런가?

 

하늘이 높은 가을,

송아지떼가 참새를 쫓는

마을 언덕은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냐만,

고혹적인 흙내가

나의 등골에 전류처럼

퍼붓고 지나간 것은,

어째서 고향의 불행한 노래뿐이냐?

 

언제부터 쌀찐 흙 속에 자라난

나무 가지엔 쓴 열매밖에,

붉은 꽃 한 송이 안 피었는가!

가끔 촌사람들이

목을 메고 늘어진 이튿날 아침,

숲 속을 울리던 통곡소리를

나는 잊지 않고 있다.

 

행복이란 꾀꼬리 울음이냐?

푸른 숲에서나, 누른 들에서나,

한 번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

태양 아래 자유가 있다 하나,

땅 위엔 행복이 있지 않았다.

 

새 옷을 갈아 입으며,

들창 너머로 불현듯

자유에의 갈망을 느끼랴는

나의 마음아!

너는 한낱 철 없는 어린애가 아니냐?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세월

 

 

시퍼렇게 흘러내리는 노들강,

 

나뭇가지를 후려꺾는 눈보라와 함께

얼어붙어 삼동 긴 겨울에 그것은

살결 센 손등처럼 몇 번 터지고 갈라지며,

또 그 위에 밀물이 넘쳐

얼음은 두 자 석 자 두터워졌다.

 

봄!

부드러운 바람결 옷깃으로 기어들 제,

얼음판은 풀리고 녹아서,

돈짝 구들장 같은 조각이 되어 황해 바다로 흘러간다.

 

이렇게 때는 흐르고 흘러서, 넓은 산 모서리를 스쳐 내리고, 굳은 바위를 깎아,

천리 길 노들강의 하상을 깔아 놓았나니,

세월이여! 흐르는 영원의 것이여!

모든 것을 쌓아 올리고, 모든 것을 허물어 내리는,

오오 흐르는 시간이여, 과거이고 미래인 것이여!

우리들은 이 붉은 산을, 시커먼 바위를,

그리고 흐르는 세월을, 닥쳐 오는 미래를,

존엄보다도 그것을 사랑한다.

 

몸과 마음, 그밖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세월이여, 너는 꿈에도 한 번

사멸하는 것이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허락한 일이 없고,

과거의 망령이 생탄하는 어린것의 울음 우는 목을 누르게 한 일은 없었다.

너는 언제나 얼음장같이 냉혹한 품안에

이 모든 것의 차례를 바꿈 없이

담뿍 기르며 흘러왔다.

 

우리들은

타는 가슴을 흥분에 두근거리면서 젊은 시대의 대오는

뜨거운 맥이 높이 뛰는 두 손을 쩍 벌리고,

모든 것을 그 아름에 끼고 닥쳐오는 세월! 미래!

그대를 이 지상에 굳건히 부여잡는다.

우리는 역사의 현실이 물결치는 대하 가운데서

썩어지며 무너져 가는 그것을 물리칠 확고한 계획과

그것을 향해갈 독수리와 같이 돌진할 만신의 용기를 가지고,

이 너른 지상의 모든 곳에서 너의 품 안으로 다가선다.

 

오오, 사랑하는 영원한 청춘 세월이여.

너의 그 아름다운 커다란 푸른빛 눈을 크게 뜨고,

오오, 대지의 세계를 둘러 보라!

누구가 정말 너의 계획의 계획자이며!

누구가 정말 너의 의지의 실행자인가?

 

오오, 한 초 한 분

온 세계 위에 긴 날개를 펼치고 날아드는 한 해여!

우리는 너에게 온 세계를 요구한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불닿는 말썽 가운데서

우리는 요구한다.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을.

오직 우리들만이

세월이여! 이것은 미래인 너에게 요구할 수 있고

한 눈 깜박할 새 천만 리 달아나는 너의 팔을 잡고

즐거운 미래를 향하여 달음칠 수가 있다

네가 알듯이 오직 우리들만이―그리하여

우리들이 한 번 그 가슴을 푹 찌를 때

우리들이 한 번 돌부리를 차고 피를 흘리며 넘어질 때

우리들이 또 한 번 두 다리를 건너고 들쳐 일어나 앞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고 내달을 제

세월이여! 너는 손뼉을 치며 우리들의 품으로 달려들어라!

 

오―ㄴ 세계를 네 품에 가득 부둥켜안고

오오! 감히 어떤 바람이 있어, 어떤 힘이 있어,

물결이여, 돌아서라! 하상이여, 일어나라!고 손짓할 것이며,

세월이여, 퇴거하라! 미래여, 물러가거라!고 소리치겠는가?

 

미래여! 사랑하는 영원이여!

세계의 모든 것과 함께 너는 영원히 젊은 우리들의 것이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안개 속

 

하늘 땅 속속들이

먹 위에 먹을 갈아 부었다.

발뿌리조차 안 뵌다만,

나는 아직 외롭지 않다.

 

비가 흩뿌리더니,

우뢰가 요란하고,

번개가 날카롭고,

드디어 내 잠자는 마을,

뭇집 들창이 캄캄하다.

길가 불들도 꺼졌다.

별도, 달도,……

 

밀물처럼 네가 쓸어와,

다시는 불도

내일 낮도 없을 듯하더라만,

나의 마을 사람들은 대견하더라!

앞을 다투어 깜북깜북

 

여러 들창이 환하니

흐득임을 보아,

오무라졌다 펴는 불촉이 분명타.

 

길 가는 나그네들이

나비떼처럼 불 갓으로 찾아든다.

볼이 패이고 뼛골이 드러났다.

별빛보다 희미한 들창이

그들에 역력한 고난을 비친다.

정녕 몇 사람을

너는 험한 길 위에 죽였을 게다.

 

네 손은 아귀가 세고 끈끈하다.

붓석 힘을 주어 움키면,

아무것이고 다 부여잡히리라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을 새는 것이 있으리라.

꼭 쥐면 쥘수록 틈이 번다.

안개 끼인 밤에는

호롱불이 보름달 같으니라.

 

물론 나그네들이야 집도 없고 길도 멀다.

그 대신 희망이 꽉 찼더라.

눈동자는 굴 속 같아야,

한 점 불이 별 같고,

가슴은 한층 밝아,

밤새도록 환히 아름답더라.

내야 눈마저 흐리다만,

아직 외롭지 않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1908∼1953) 약력

본명 인식(仁植).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중학을 중퇴했으며, 1926년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습작품을 발표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화가의 시'로 등단. 1929년에 「네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 등의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대 중반 사회 정세가 악화되면서 낭만적 경향의 시를 썼으며,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7년 월북후 미제의 간첩이라

는 죄명으로 1953년 사형을 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1938)과 『찬가』(1947) 평론 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