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 밤 갑판 위
너른 바다 위엔 새 한 마리 없고, 검은 하늘이 바다를 덮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배는 한곳에 머물러 흔들리기만 하느냐?
별들이 물결에 부딪쳐 알알이 부서지는 밤, 가는 길조차 헤아릴 수 없이 밤은 어둡구나!
그리운 이야 그대가 선 보리밭 위에 제비가 떴다. 깨끗한 눈가엔 이따금 향기론 머리칼이 날린다. 좁은 앙가슴이 비둘기처럼 부풀어올라, 동그란 눈물 속엔 설움이 사모쳤더라.
고향은 들도 좋고, 바다도 맑고, 하늘도 푸르고, 그대 마음씨는 생각할수록 아름답다만, 울음소리 들린다, 가을바람이 부나 보다.
낙동강가 구포벌 위 갈꽃 나부끼고, 깊은 밤 정거장 등잔이 껌벅인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누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건넛마을 블들도 반짝이고, 느티나무도 거멓고, 앞내도 환하고, 벌레들도 울고, 사람들도 울고,
기어코 오늘밤 또 이민 열차가 떠나나 보다.
그리운 이야! 기약한 여름도 지나갔다. 밤바람이 서리보다도 얼굴에 차, 벌써 한 해 넘어 외방 볕 아래 옷깃은 찌들었다.
굶는가, 앓는가, 무사한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도 알 수 없는 청년의 길은 참말 가혹하다.
그대 소식 나는 알 길이 없구나!
어느 누군 사랑에 입맛도 잃는다더라만, 이 바다 위 그대를 생각함조차 부끄럽다.
물결이 출렁 밀려오고, 밀려가고, 그대는 고향에 자는가? 나는 다시 이 바다 뱃길에 올랐다.
현해(玄海) 바다 저쪽 큰 별 하나이 우리의 머리 위를 비출 뿐,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않는다만, 아아, 우리는 스스로 명령에 순종하는 청년이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벌레
사람들은 말하기를, 벌레는 하등동물이다. 참말로 이것은 의심할 수야 없는 것이다.
하룻날 가을 바람과 함께 오지게 익어가는 논배미 좁은 길을, 이슬진 풀잎을 걷어 차며 바닷가에 나아가니, 벌써 제철을 보낸 늙은 벌레가 하나, 새로 쌓아 올린 매축지(埋築地) 시멘트 벽을 기어가다, 나를 보고 놀래기나 한 듯, 소스라쳐 물 속으로 딩굴어 떨어진다.
텀벙…… 지극히 조그만 소리가 나면서 엷은 파문이 마치 못 이기어 인사치레나 하듯 스르르 퍼진다.
그러나 물결이 한 번 돌을 치고 물러갈 때, 바다는 아까와 다름 없이 아침 햇발을 눈부시게 반사한다. 아직 아무도 밟아본 듯 싶지 않은 정한 돈대 위에, 좁쌀 같은 새까만 똥알이 여나문 나란히 벌려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늙은 벌레가 죽음으로 가던 길이면서, 그가 아직도 살았었노라 하던, 최후의 유물임을 누구가 의심할까.
내가 한 마리 이름 없는 벌레와 다른 게 무엇이냐. 고지식한 마음이 제출하는 질문의 대답을 찾으려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었을 제, 심히 노한 태양의 표정에 두 손으로 나는 얼굴을 가리었다.
이 때 물결이 어머니처럼 이르기를, 사람은 봄에 났다 가을에 죽는 벌레는 아니니라.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도 이젠 소용이 없는가? 포구 저쪽으로 물결은 돌아갔다.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삼월일일(三月一日)이 온다
언 살결에 한층 바람이 차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 오는 날
봄보다도 먼저 삼월일일(三月一日)이 온다
불행한 동포의 머리 위에 자유 대신 남조선(南朝鮮) 민주의원(民主議院)의 깃발이 늘어진
외국 관서의 지붕 위 조국의 하늘이 각각(刻刻)으로 내려앉는 서울
우리는 흘린 피의 더운 느낌과 가득하였던 만세 소리의 기억과 더불어 인민의 자유와 민주조선의 깃발을 가슴에 품고
눈을 떠도 눈을 떠도
티끌이 날려 오는 날
봄보다도 일찍 오는 삼월일일(三月一日) 앞에 섰다.
찬가, 백양당,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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