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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임화 시인 / 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8.

임화 시인 / 들

 

 

눈알을 굴려 하늘을 쳐다보니,

참 높구나, 가을 하늘은

멀리서 둥그런 해가 네 까만 얼굴에 번쩍인다.

 

네가 손등을 대어 부신 눈을 문지를 새,

어느 틈에 재바른 참새놈들이

푸르르 깃을 치면서 먹을 콩이나 난 듯,

함빡 논 위로 내려앉는다.

 

휘어! 손뼉을 치고 네가 줄을 흔들면,

벙거지를 쓴 검은 허수아비 착하기도 하지,

언제 눈치를 챘는지, 으쓱 어깨짓을 하며 손을 젓는다.

 

우! 우! 건넛말 네 동무들이 풋콩을 구워 놓고,

산 모퉁이 모닥불 연기 속에 두 손을 벌려 너를 부르는구나!

 

얼싸안고 나는 네 볼에 입맞추고 싶다.

한 손을 젓고 말없이 웃어 대답하는

오오 착한 네 얼굴.

 

들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어찌 마음이 없겠니?

덥고 긴 여름 동안 여위어 온 네 두 볼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철뚝에 선 나뭇잎들마저 흐드러져 웃는구나!

 

지금 네 눈앞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오지게 찬 벼 이삭이 누렇게 여물어 가듯,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자유롭게 너희들은 자라겠지……

 

자라거라! 자라거라, 초목보다도 더 길길이,

오오! 그렇지만 내 목이 메인다.

 

바람이 불어 온다.

수수밭 콩밭을 지나 네 논두둑 위에로,

참새를 미워하는 네 마음아,

한 톨의 벼알을 뉘 때문에 아끼는고?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바다의 찬가

 

 

장하게

날뛰는 것을 위하여,

찬가를 부르자.

 

바다여

너의 조용한 달밤일랑,

무덤길에 선

노인들의 추억 속으로,

고스란히 선사하고,

푸른 비석 위에

어루만지듯,

미풍을 즐기게 하자.

 

파도여!

유쾌하지 않은가!

하늘은 금시로,

돌멩이를 굴린

살얼음판처럼

뻐개질 듯하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야……

두 발을 구르며,

동동걸음을 치고,

나는

번갯불에

놀라 날치는

고기 뱃바닥의

비늘을 세고

 

바다야!

너의

가슴에는

사상이 들었느냐

 

시인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침묵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육체의 곡조를

반주해라.

 

현해탄, 동광당서점, 1938

 

 


 

 

임화 시인 / 발자욱

부제: 붉은 군대(軍隊)를 환영(歡迎)하기 위하여

 

 

그대들은 정녕

붉은 군대(軍隊) 붉은 영웅(英雄)

방금 만주(滿洲) 국경(國境)을 넘어왔는가

 

약(弱)한 민족(民族)에 대(對)하여

이리 같었든 군국주의(軍國主義)

주린 만주(滿洲)사람과

유랑(流浪)하는 우리 동포(同胞)가

개같이 사역(使役)되던 벌판

오만한 장군(將軍)이 눈을 부릅뜨고

호령(呼令)하던 저 점점(點點)한 포루(砲壘)

우리의 피와 원한(怨恨)의 성곽(城郭)들이

낱낱이 티끌처럼 흩어졌는가

 

말을 타고 전차(戰車)를 타고

그대들은 빛나는 깃발 날리며

하이랄평원(平原) 북만(北滿)의 삼림(森林)

흑룡강(黑龍江)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아아 피의 젖은 우리의 국토(國土)

함경도(咸鏡道) 평안도(平安道)로 들어오는가

 

즐거움도 반가움도 모르던 우리 동포(同胞)

그대들의 무거웁게 이끄는 군화(軍靴)를 바라보는 우리 동포(同胞)

파시즘을 짓밟은 힘찬 발길엔

서구(西歐)의 거먼 흙이 미처 털리지 않았고

찌들은 군복(軍服) 위 불똥처럼 밝은 별은

레―닌그라―드의 탄환(彈丸)자욱이냐

모스크바 교외(郊外)의 칼 흠집이냐

아아 승리(勝利)와 영광(榮光)에 빛나는 스타―린그라―드의 용사(勇士)도 왔구나

 

이름이 그대로 노래인 나라의 군대(軍隊)여

이름이 그대로 희망(希望)인 나라의 군대(軍隊)여

 

그대들이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영토(領土)인가

그대들이 들고 오는 것은 우리의 기(旗)ㅅ발인가

그대들이 부르고 오는 것은 우리의 노래인가

우리는 어느것이 그대들의 것인지

어느것이 우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어린 아이처럼

손에 쥐인 깃대를

흔듦조차 잊고

저벅저벅 울려 오는

그대들의 발자욱 소리

멀리 북방(北方)에 드르며

영토(領土)보다도 깃발보다도 노래보다도

그대들의 것이면서 세계(世界)의 것이었던

큰 정신(精神)이 따뜻하게

우리 옆에 있음을 느끼고 있다

 

찬가, 백양당, 1947

 

 


 

임화 시인 / (1908∼1953) 약력

본명 인식(仁植).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중학을 중퇴했으며, 1926년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습작품을 발표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화가의 시'로 등단. 1929년에 「네거리의 순이」「우리 오빠와 화로」 등의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였다. 1930년대 중반 사회 정세가 악화되면서 낭만적 경향의 시를 썼으며,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7년 월북후 미제의 간첩이라

는 죄명으로 1953년 사형을 당했다. 시집으로 『현해탄』(1938)과 『찬가』(1947) 평론 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