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린 시인 / 서울은 야생마처럼 거인처럼
새벽 네 시의 서울은 분지의 윤곽만 살아 있을 뿐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표지등과 같이 유난히도 반짝이는 수은등은 거리와 구릉과 골짜기를 불태우는 별이라 해둡시다 어둠 속의 그 많은 재화와 권력과 사랑을 내장한 채 잠자는 건물들은 도시의 거인 아니면 분지에 사는 야생마입니까 아직껏 관능을 다하지 못한 네온이 뿜는 색소의 무늬 아래 취기 어린 그림자마저 사라져간 거리 단지 야간인구를 위해 질주하는 차륜의 폭음만이 관현악처럼 울려퍼지는 하늘 희색 물감이 흘러내리는 하늘에 누른 빛깔이 스며들고 신문배달 소년의 발굽소리와 청소부의 하품소리와 어머니의 도마소리에 깨어나면 힘찬 호흡과 거대한 엔진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는 서울은 야생마처럼 거인처럼 오늘과 미래의 세계도시를 향해 질주하는 마라톤 선수입니까
김경린 시인 / 선회(旋回)하는 가을
저녁 노을이 하이얀 은지(銀紙)를 나의 가슴에 바르고 지나가던 날 구름을 향하여 한층 더 가벼워지는 지구에 실오리같은 가을이 쏟아져 왔다
오랜 세월을 두고 메마른 습성이 나의 피부에 잦아들면 그리운 벗이여 어린날에 두고 온 검은 벽화의 모습마저 잊어버려야 하는가
머얼리 나의 영토가 바람결에 나부낄 때 나는 부드러운 사랑의 속삭임도 없이 아스러운 공간 위에 채찍처럼 달리고 있었다
김경린 시인 / 수많은 아침과 함께
녹슬은 음향이 밤의 간격을 뚫고 멀리 지붕을 넘어간 다음 나의 가슴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아침과 함께 까닭모를 경기는 벌어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부질없는 데몬스트레이션만이 흥행하였고 오 그러나 사람들이여 나부끼는 계절아래 그대들의 위치를 찾아가라
끊임없는 변모에 주름살 잡힌 황혼이 걸어오면 나의 잔등에 사라지는 산그림자를 바라보며 초조히 돌아가는 사람들 오 나의 창 위에 또다시 밤의 기류가 부서진다
김경린 시인 / 어머니의 하늘
그때 유난히도 푸르게 흘러내리는 하늘을 마시며 어머니의 잔등에서 오수의 긴 여행도 했었지 그 따스한 체온과 박가분처럼 고웁던 어깨의 능선은 지금 어디로 갔읍니까 단지 그 하늘에 과학이 날으고 밤이면 별이 기억처럼 반짝일 뿐 어머니의 그때 하늘은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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