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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잉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8.

박남수 시인 / 잉태(孕胎)

 

 

감탕을 먹고

탄생하는 연꽃의 아기가

이끼 낀 연못에

웃음을 띄운다.

 

지금 한창

별을 빨고 있는

이승의 뒷녘에서는

외롭게 떨어져 가는

 

낙일(落日)의 후광

구천(九天)에 뿜는 놀의 핵심에서

부신 상(像)이 타면

나는

어둠에 연소하는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이 시에서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 빛의 이미지 속에서 복합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탄생하는 아기는 이승의 공간에서 '별을 빨고'있고 생명이 다 해 사라져야 하는 '나'는 저승의 공간을 향해 떠나려 하는 대립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한 대립에서 끝나지 않는다. 탄생하는 '연꽃'의 이미지를 통해 우주적 생명력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융합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생성과 소멸,즉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인 차원은 상승과 하강이 동일시되고 있는 빛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며 의미의 폭을 심화시킨다. 어둠과 빛이 대립적 이미지로 제시되던 초기시의 경향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제시되고 있는 빛의 이미지는 화자의 내부에서 빛이 어둠을 불사르고 어둠이 곧 빛을 연소시키는 상태로 융합되고 있는 것이다.

 

 


 

 

박남수 시인 / 아침 이미지 1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사상계>(1968)-

 

 

위의 시는 사물들이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아침이 되면 빛에 의해 활기를 찾는 정경을 이미지의 제시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핵심적 요소인 밀려나는 어둠과 찾아오는 아침-빛-의 관계는 대립적인 이미지 구도를 형상하고 있다. 나아가 이미지의 대립은 소멸과 생성이라는 의미로 확대되고 하강과 상승이라는 관념의 대립으로까지 연결된다.

 

중기 시에서 두르러지는 박남수만의 독특성이라면 그것은 '빛'과 더불어 '새'의 이미지가 시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는 그 특성상 순수성과 비약 그리고 상승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새의 이미지는 지상과 하늘이라는 양자 세계의매개적 존재로 기능하기도 한다.

 

 


 

 

박남수 시인 /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에서

 

 

3.

사람은 모든 원생의 새

어느 기억의 숲을 날며 가지 무성한 잎 그늘에

잠간씩 쉬어가는 원생의 새

지평과 하늘이 맞닿는 곳에서 새는

땅으로 꺼져들던가 하늘은 증발되어 그 형상을 잃는다.

 

당신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산새가 죽어, 눈에 끼던 흰 안개 같은 것,

 

커어피를 마시며

아침 두시, 분명 어딘지 모를 어느 숲의 기억에서

당신은 날아왔다. 나의 내벽에 메아리가 되어

 

 

이 시에서도 '새'의 이미지는 시인의 존재론적 태도를 밝히는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 새와 화자는 동일시되고 있으며 원시적 생명력을 지닌 '원생의 새'로 존재한다. 그리고 기억의 숲을 날던 산새가 죽어가면서 보는 흐릿한 안개빛은 화자가 떠올리는 원시적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환치된다. 초기시에서처럼 철저한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시에서처럼 철저한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의 세계만으로 일관하는 태도에서는 벗어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의미에 대한 추구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 그리고 물질문명에 대한 역사적 비판의식 까지 갖춤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미지로 확대되는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제2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