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린 시인 / 오후의 예절
비늘 돋친 오후에도 물결처럼 빛깔을 헤치며 흐르는 그림자가 있어 나는 슬프지 않아도 좋았다
돌아오지 않는 원주(圓周)처럼 물결 이는 나의 위치에서 수많은 에고이즘과 고갈된 휴매니티와의 교차를 바라보며 때로는 모랫벌 위의 나비처럼 전쟁을 잊어버리고도 싶었다
오 그러나 공포와 예절로서 장식된 나의 연대(年代)는 또한 지성을 잊을 수 없는 숙명이기에 시인 막쓰 쟈아고프가 나치스에 피살되었다는 보도를 들은 날은 항구의 언덕 위에서 손수건처럼 찢어지는 구름만을 미화(美化)할 수는 없었다
보다 더 새로울 수 있는 시간과 화려하였던 과거를 잊을 수 없는 교류점에 서서 오늘도 나는 슬프지 않아도 좋았다
김경린 시인 / 의식(意識)의 강가에 내리는 가랑비
어제와 다름없이 의식의 강가에 가랑비가 내리고
지난날의 일지(日誌)속에 두고 온 자랑스러운 일들이라 해도 휴지처럼 소각되어야 하는 오늘 한때 불 같은 황제 앞에 브리핑의 갱지를 날리던 계절의 기록들은 이제 아무도 모르게 풍화되어 가는 공로패라 해도 좋다
또다시 끊임없이 유동하는 삶의 흐름 속에서 오늘의 부채(負債)를 그 누구에게도 이체(移替)할 수는 없어 퇴근길에 잠시 정지하여 보는 네거리 수은등이 밤을 토하는 네거리는 회전목마처럼 아름다워
일찌기 목마를 사랑하던 사람은 이미 지구 밖에서 산 지 오래고 또다시 우주인들이 가져다 주는 새로운 뉴우스에 온 지구가 출렁이고 있을 때 너는 구름엽서조차 없는가
어제와 다름없이 의식의 강가에 내리는 가랑비 속에서 밤이 기체를 애무 애무하며 흐르는 별들의 거리를 간다
당신은 나의 과거와 미래를 말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많기에 정녕 과거와 미래를 말하지 마십시오
그 누구에게 말했던가 삶의 액체가 넘쳐흐르는 오늘의 하늘을 마셔야 하는 당신과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오늘의 이단자 아니면 알레르기성 환자
김경린 시인 / 의식 속의 나비들
나의 의식 속 깊이 흐르고 있는 시냇가에 또다시 흰구름이 지나 가고 푸른 계절이 쏟아져 왔다 하여 그대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빌딩의 창가에서 나비처럼 날아 내린들 무엇합니까
한때 나뭇가지처럼 가로 누운 층계를 내려 오며 외래서적과 더불어 현대가 몹시도 그립다던 친우도 돌아오지 않는 오후 다만 방사성능에 젖어 새로운 학설을 가졌다는 교수와의 악수만이 무척 따사로와진다
벌써 신앙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신앙속에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들에게 오늘의 새로운 사실들을 말한들 무엇합니까
오히려 끊임없이 나의 의식 속에 날아드는 나비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메세지나 전달할 준비를 갖춤이 어떠할까
김경린 시인 / 자성(自省)의 계곡에서
하나의 사물만을 깊이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 괴로움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의식하면서도 그대에게 가까워지는 나의 마음이 동심력(動心力)속에 있듯이 봉사라든가 영원이라든가 하는 어휘들은 때로 나를 부자유스러운 계곡속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망각의 세계에 추락하고야 말 모놀로그의 반사를 받으며 하나의 자성을 위하여 조용히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비록 패배를 의미한다든지 혹은 위선을 자랑해서가 아닐지라도 교통차단에서 기다리는 사람같이 우리들은 차라리 질서속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때로는 나의 늑골에 구멍을 뚫고 가버린 비둘기들이 회상의 침실에 날아들까 두려워 황혼이 기어드는 창을 닫히면 잉크에 물들어 버리고야 말 나와 나의 간격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있어 밤은 지구의 밖에서 안개처럼 흘렸는지도 모른다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남수 시인 / 손 외 4편 (0) | 2019.07.30 |
---|---|
임화 시인 / 밤 갑판 위 외 2편 (0) | 2019.07.29 |
박남수 시인 / 맨하탄의 갈매기 외 2편 (0) | 2019.07.29 |
임화 시인 / 들 외 2편 (0) | 2019.07.28 |
김경린 시인 / 서울은 야생마처럼 거인처럼 외 3편 (0) | 2019.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