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린 시인 / 화장한 연대(年代)를 위하여
오늘도 전쟁으로 인하여 피로한 나의 이미지에 가을비가 내리고
경사진 가로(街路)와 그렇게도 못잊었던 애정에 균열(龜裂)이 생길까 하여
때로는 부질없는 안일의 지대를 찾아보기도 하였다
선전삐라처럼 질주하는 윤전기와 군용열차의 폭음이 음악이 될 수 없는 지표에서 내일을 약속하라는 아버지를 배반할 수 없는 숙명은 차라리 화려한 속도와 화장법을 배우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연대(年代)와 그리고 변함없는 하늘과 별들은
나에게 새로운 형이학(形而學)을 요구하였음은 무리가 아니지만
바람과 온도가 그리는 포물선은 낡은 서명을 의미하기에 분바른 정치가와도 같이 함부로 비상할 수 없는 오늘이었다.
김경린 시인 / 지나치게 푸르러서
지나치게 푸르러서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잊었던 기억들이 재생되어 오는 것처럼 황사 현상이 당신 얼굴마저 흐리게 하는 날에도 길가에 길게 늘어선 가로수의 잎사귀와 마천루처럼 높은 담벼락 사이로 팔을 길게 내미는 라일락의 끝마디에서도 푸름이 크레파스처럼 흘러내리는 아침
저기 앞이 하늘에 내려와 머물고 습기가 피부에 잦아드는 날이면 신경을 자극하는 전류들이 팔을 아프게 한다는 그 사람에게 푸름이 담긴 시집을 남긴 채 내려오는 언덕 길에도 푸름은 동반자처럼 따라오고
참으로 우연하게도 언젠가 사랑 때문에 푸름과 자주색을 무척 좋아한다던 그 여인을 그날 만나게 된 것은 그 무슨 인과 관계인지 모를 일이기도 한데
거리의 사람들은 오늘의 바람을 아킬레스건으로 비유도 하지만
지나치게 푸른 계절 때문에 슬픈 것은 물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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